Call the turn - 사리풀 Call the turn 1 사기연이 울면서 뛰어나간 후, 아니 정확히는 꽤 매서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황당하게도- 갈기고 튀어버린 후, 완벽히 나는 천하에 다시없을 몹쓸 놈이 되어있었다. 그야 배신당한 여주인공마냥 연극적으로 교실 문을 박차고나가는 폼이, 보는 입장에서야 불쌍해 보일 법도 할 터. 하지만 다 큰 사내자식들이 뒤에서 수군수군대는 모습들이라니-. 다소 험악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눈을 피하는 교실 녀석들이지만 괜히 민망해져서 교실을 나와 버렸다. 아아, 젠장. 확실히 안하던 짓을 하니 일이 터지는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수업이나 들어볼까하고 교실에 있었더니-. 그래도 사내자식에게 맞은거라 뺨이 얼얼하다. 이런, 피까지 나잖아. 씹-. 상처를 혀끝으로 핥으며 중앙계단을 올라갔다. 그야, 사실 달리 갈 데도 없으니까. 지금 시간이면 틀림없이 화인이 녀석들도 있을거다. 불쾌한 기분에 옥상 문을 걷어차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녹슨 문 사이로 예의 담배를 입에 문, 화인이 자식. 저런, 오늘은 충두랑 계원이 놈도 있군그래. 이거 망신살 톡톡히 뻗쳤구만. “여어, 오늘은 안올 것 같더니 왠일이냐?” 담배를 입에 문채로 빙글빙글 돌리며 권화인이 묻는다. 어째 묘하게 비웃는 듯한 어조. 녀석의 버릇이긴 하지만. “한비류, 그 상처는 뭐냐? 누구한테 맞았냐?” 역시나 눈썰미 좋은 정충두. 나름대로 멋이랍시고 입이랑 코에 주렁주렁 피어싱을 달고 다니는 녀석이다. 녀석의 무시무시한 붉은 머리를 포함해 내겐 이해 못할 부분이지만. “아아, 고양이가 할퀴던걸?” “무슨 소리야?” 화인이 자식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다. 제대로 설명하란 뜻이다. 이 녀석은 의외로 성격이 급해서 처음 녀석을 대하는 사람들은 몹시 당황하곤 한다. 여유와 나른함을 온몸으로 내뿜는 녀석에겐 의외의 부분이랄까. 뭐, 나야 10년을 괜히 녀석 옆에 있었던 게 아니지만. 더구나-, 어차피 이미 학교 내에 다 퍼져있을 얘기라 굳이 숨길 이유도 없다. 내려가서 한 놈만 잡아 족쳐도 과장까지 해가며 술술 불테니. (좀 쪽팔려서 문제지.) “사기연이 치고 가더군.” “큭, 너 그 자식한테 맞은 거야? 킥킥” 아아, 제기랄. 바닥을 구르며 웃어대는 충두 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역시 피식 웃어버리는 화인이 놈. 표정변화 없는 계원이 자식까지 눈이 웃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사기연을 묻어버려야..!! “이봐, 살인은 안돼.” 그렇게 비웃으며 말해봐야 설득력 없는 걸 아냐, 권화인? “그러게 니가 그 녀석 깔 때부터 알아봤다. 그 자식 우리학교 퀸이잖아.” “닥쳐, 정충두. 그놈이 먼저 꼬리쳤다고. 몇 번 박아준 게 단데 마누라 행세를 하려 들잖아.” “확실히 너로선 당연한 일이군.” 잠자코 있던 계원이 녀석도 맞장구치는 것이- 적어도 네놈들한텐 그런 말 들을 이유 없다고! “그래서 어떡할거냐, 그 자식?” 입에 물고만 있던 담배를 집어 던지면서 화인이 놈이 말한다. 녀석의 매력적인 긴 손가락에서 호를 그리며 날아가는 담배를 보면서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그 조그만 녀석을 린치라도 하라는 거냐. 나도 그 정도로 양심 없는 놈은 아니라고. “됐어. 다시 볼 놈도 아니고.” “그럼 내가 좀 봐줘도 되겠군.”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술에 신경 쓰느라 녀석의 검은 눈이 말하는 것을 미처 읽지 못했다. “뭐?” “난 먼저 일어난다. 볼일이 있거든-.” 노랗게 탈색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서는 폼이- 아아, 역시 섹시한 놈이군하고 감탄하게 만들어서, 나른하게 걸어가는 놈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나보다 녀석이 크지만 않았어도 한번 덮쳐봤을 텐데-하고 아쉬워하고 있을 때, 충두 녀석이 중얼거렸다. “위험한 걸, 저 자식. 방금 야릇하게 웃었다고.” 그야, 야릇한 웃음은 녀석의 트레이드 마크인걸, 뭐. “좀 복잡해지겠군.” 계원이녀석의 낮은 허스키 보이스를 흘려들으며 콘크리트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봐, 그녀석이 좀 돌긴 했어도 10년 지기 친구라는 놈들이 이래도 되는거냐? “큭. 재밌어지겠네, 뭐.” 충두야. 입에 옷핀을 빛내며 말하는 폼이 무척 섬뜩하구나-. 하긴, 화인이 놈. 터뜨릴 때가 됐나? 바닥을 타고 콘크리트의 차가운 한기가 올라왔지만 그대로 누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가린다. 젠장, 지독히도 맑은 하늘이다. Call the turn 2 10년이라니-, 나도 화인이 녀석들도 미친 게 틀림없다. 누구보다 마이 페이스인 녀석들이 이렇게 오래 붙어있었다니. 덕분에, 처음 고등학교 입학해서 녀석들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갔을 때, 시비라도 붙는 건가 긴장하면서 학교 녀석들이 몰려들었을 정도. 하긴, 반도 각자 달랐던 데다가 워낙 자기중심적인 녀석들뿐이라 서로 찾아가며 만나진 않았지. 게다가 화인이와 충두야, 나와 마찬가지로 생양아치 부류였지만 계원이의 경우, 학년 수석으로 입학했던 녀석이었으니. 하지만 학교 내에선 스마트한 모범생역을 연기해내는 녀석이, 말하자면 지하세계의 왕자라는 이야기. 눈 하나 깜짝않고 사람 내장도 끄집어 낼 놈이 이 놈이다. 계원이 놈 못지않게 충두 녀석도 독한 놈인데 특히, 얼굴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이 증거라면 증거. 예쁘장한 얼굴에-키는 좀 큰 편이지만- 어울리지 않는 피어싱과 무시무시한 붉은 머리는 묘하게 대조되서 더욱 녀석을 튀게 만드는 것이다. 학년 초에, 멋모르는 햇병아리 교사가 녀석의 패션을 꼬투리 잡았다가 코뼈가 부러진 이후로, 아무도 녀석을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중에서야 제일 성격이 좋은 녀석인데 실상 그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 녀석의 외모에 반했다는 변태 녀석들도 교사코뼈참사-_-사건을 기점으로 싹 사라졌다. 하긴, 이 녀석의 지랄맞은 성격(어디까지나 우리 중에서 제일 성격이 낫다는 얘기)에 사내놈에게 깔릴 리가 없지. 그리고-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해 불가능한 존재, 권화인. 늘 묘하게 비웃는 듯한 미소로 나른하게 앉아있다가도 한순간에 날쌘 표범처럼 움직이는 녀석이랄까? 사실,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다. 문제는, 녀석의 인력은 누구보다 세서 위험스런 아름다움에 도취된 재물마냥 녀석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 어떠한 탐미적인 화풍도 녀석의 아름다움을 반도 표현하지 못할 거다. 왜곡되고 비틀린 매력, 큭. “언제까지 킥킥대고 있을 거냐? 별 같잖은 거한테 맞고 오더니 뇌에까지 이상이 생겼냐?” 충두놈이 담배를 옥상 바닥에 비벼끄며 말한다. 자식아, 다음에 앉을 자리에 담배를 비벼끄는 똘빡이 어딨냐... “슬슬 일어서자. 벌써 수업 거의 끝나간다.”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는 카리스마 소계원. 아아, 그런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던가? 차라리 양호실에 가서 잠이나 잘걸. 담배만 연달아 태우다 가는군. “아아, 그런데...” 옥상 문을 반쯤 열다 계원이 놈이 뒤돌아선다. “너 그 자식 문제, 잘 처리해라.” 그 자식? 아아, 사기연. “계원이 말이 맞아, 이 씹새야. 어디가서 너 내 친구라고 하지 말아라. 존나 쪽팔리게 걸레한테 얻어터지고 다니냐?” “충두야, 말 좀 곱게 해라. 그리고 걔 걸레는 아니다.” “머저리 같은 새끼-” 침을 뱉으며 옥상을 나서는 충두 뒤를 따르면서 슬핏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야 물론 사기연 자식은 괘씸하기 그지 없지만-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뺨 한대 맞은 걸로 열 내는 것도 웃긴 일이다. 사실 아까도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다고. 그런데 왠지 그 자식-, 묘하게 상처받아 보여서 맞아주고 싶었다. 뭐, 맞고 나선 열이 올라 두들겨 패줄까 했었지만. 교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뺨을 쓸어본다. 왠지, 아직도 녀석의 손 느낌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젠장, 처음부터 너무 순진해보여서 안 건드리려고 했었는데 그 바보 같은 자식이-. 나야 그쪽으로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많아 녀석이 애초에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다가오길래 장난 반으로 안았는데. 녀석이 처음인걸 알았을 때는 이미 멈출 수 없었던 상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먹이던 게 생각나서 갑자기 착잡해진다. 아아, 그러고보니, 젠장! 나 이유도 모르고 맞은 거였잖아?! Call the turn 3 교실로 돌아와 보니, 호오- 그새 수업이 끝났군. 청소랍시고 먼지만 날려대던 몇 놈이 내가 교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동작을 멈춘다. 킥, 꽤 재미있군. 아아, 너무 긴장할 거 없다고. 그깟 먼지 좀 날린다고 딴에는 청소하는 새끼들을 밟겠냐? 충두와 화인이라면 그럴지도-. 엄한 생각을 하며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등에 걸쳤다. 좀, 확실히 피곤하다. 남녀공학 이였으면 좀 덜했을 텐데 남학교는 쓸데없이 힘의 논리가 극단적으로 적용되는 공간이여서, 긴장하고 쭈뼛거리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다. 내가 한 놈 이라도 제대로 패고 이런 대접을 받는 거면 이해나 하지. 이건, 재미없는 소문만 듣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 꼴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놈은 달랐다. 그 사기연놈. 그다지 남자를 안는 건 즐기지 않는데도 그놈을 안았던 건-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던 그 눈 때문에. 흰 피부라던가 동그란 눈, 조그맣고 두툼한 입술이 여자였다면 상당히 내 취향이었기 때문에. 이런, 젠장. 또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만하자. 꽤 마음이 동했던 건 사실이지만 싸대기를 날린 사내새끼에게 나도 더 이상 너그러울 수는 없다고. 녀석도 지 목숨 귀한 줄 알면 알아서 피해 다니겠지. 화인이 녀석에게나 가볼까 하고 교실을 나섰다. 녀석이 2반이던가? 평소에 기다렸다 집에 같이 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제일 제멋대로에 예측 불가능한 권화인마저도 행동을 같이 하는데 나는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건 질색이랄까. 덕분에 충두놈의 지랄맞은 잔소리를 죽도록 듣고 있지만. 사실 모두 집이 가까운데다 노는 범주마저 거기서 거긴데 굳이 함께 집에 가야하는 건 뭐냐고. 물론 가끔은 예외. 오늘은, 아무래도 아까 화인이 자식의 이상한 말도 맘에 걸리고, 충두놈 잔소리도 듣기 싫고. 중앙계단을 지나 2-2란 파란색 푯말이 걸려있는 교실을 찾았다. 충두와 계원이의 반은 아래층이라 화인이 자식 교실에 먼저 온 건데 어쩐지 조용하다. 벌써 청소도 끝난 듯 하다. 화인이 자식, 벌써 갔나? 벌써 불까지 꺼져있는 듯한데 있을 리가 없지..라고 생각은 해도, 어쩌면 모르는 일. 반쯤 열린 앞문으로 어둑한 교실을 둘러봤을 때, 빙고! 불이 꺼졌다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저 키 큰 놈은 분명 권화인 자식......아, 한 놈이 더 있다... 그런데 저 작은 놈은 어디서 많이 보던........ !!!!!! 부둥켜안고 딥키스를 하고 있는 두 인영. 반쯤 열려있는 문틈으로 보이는 저 두 놈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놈들이 맞다. 권화인과 사기연. 씨팔, 안하던 짓을 하니깐 재수가 없다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서는 마지막 시선에 보인 건, 파르르 떨리는 사기연의 감긴 긴 속눈썹. 권화인의 교복 마이 단을 쥔 작고 흰 손. 키를 맞추느라 그랬는지 책상에 걸터앉은 화인이 놈. 빌어먹을, 남의 러브씬을 보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도 없다더니-. 더구나 친구와 몇 번 안았던 놈이 상대라-. 그러고 보니 저 두 놈 같은 반이었군. 아예 집에 갈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관계가 지저분해지는 건 원래 질색이라, 상종 못할 카사노바라 불리는 나라도 나름대로 룰은 지켜왔다. 권화인, 이 씨발 새끼야. 난 네놈의 그 수많은 상대들, 건드린 적 없다고. 뭐,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구멍을 찾는 니놈 상대를, 내가 다 알 수 있을 리는 없지만. 훗, 하지만 이렇게 열 내는 게 웃긴 건가? 내가 알기로 화인이 놈. 남자를 안는 건 본적이 없다. 관계하기엔 워낙 문란한 녀석이지만 그 이상으로 잘난 놈이라, 진심이기만 하다면 나 같은 것보다야 훨 낫다. 교문을 나설 즈음에 핸드폰에 의례 충두 놈 번호가 떴지만-, 아아, 젠장! 왜 두 놈의 키스씬이 잊혀지지가 않는 거냐구우-! Call the turn 4 생각해보면 언제고 한번쯤 이런 일이 터질 법도 했다. 그게 사기연 같은 사내새끼라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글쎄, 권화인은 남자는 안지 않았다니까-) 평소에 나와 화인이 자식은 묘하게 취향이 같아서, 저 여자 괜찮군 하고 생각하면 화인이 자식이 먼저 건드렸던 여자이길 여러 번. 뭐, 그야 여자는 많으니 입맛 다시며 물러서곤 했지만. 사기연 자식은 내가 보기에도 꽤 맘에 들었던 상대이니 화인이 자식 눈에 찰 법도 하다. 녀석 성격에 내가 먼저 따먹었던 놈이란 게 걸릴 리 만무. 반대로 사기연 자식이야, 권화인의 매력에 넘어가는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바뀔 정도라니-, 아, 나 좀 섭섭한 건가? 젠장, 진심인 줄 알고 맞아준 게 좀 억울하긴 하다. 침대에 교복도 벗지 않은 채로 누워 있다가 아무래도 허기가 져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그다지 입맛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방을 나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니 식욕이 돈다. 확실히 이번 가정부는 솜씨가 좋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생각하니, 나도 참 궁상맞군. 어린 기억에, 일 문제로 거의 언제나 부재중인 부모님은 참 서러운 존재였다. 커다랗기만 한, 적막한 집에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무서워져서 울기도 여러 번. 그럴 때면 어떻게 아는지 벨을 눌러대던 녀석들. 아, 나 꽤 따뜻한 기억을 갖고 있잖아? 물론 들어와서 아버지의 양주를 거덜내는 녀석들을 보고 아연실색. 그 당시 난 꽤 심약한 녀석이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언제나 일을 만드는 건 화인이와 충두 놈이었다. ................이거 따뜻한 기억이 맞는 건가? 녀석들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우리 집 방문을 멈춘 건 내가 더 이상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자랐을 때. 제일 작았던 키가, 개중 제일 컸던 화인이 자식을 따라잡았을 때였지, 아마. (지금은 도로 추월당해 녀석보다는 작지만) 녀석들이 방문을 멈췄을 때 나는 어땠더라? 마치 어른으로 인정받은 것 마냥 우쭐하고 한편으론 아쉬웠던가? 녀석들과 동등해지고 싶어 몸이 달아있었으니까, 그 당시의 나는. 확실히 그 때엔 계집애처럼 생긴 충두 놈에게 조차 배려를 받고 있었으니-. 어쨌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유년 시절은 녀석들의 인정과 함께 끝이 났다. 그 후로도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녀석들이 생각나곤 했는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녀석들에게-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 인정받은 뒤에 시작된 건, 대련-_-이었다. 황당하게도 녀석들은 내게 싸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녀석들을 심약하기 짝이 없던 내가 따라갈 수 있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화인이 놈은, 싸울 때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지는 타입이라 대련을 핑계로 나를 두들겨 패놓기 일쑤. 다른 녀석들이 그나마 내 사정을 봐준 것에 비해 녀석은 내 뼈를 부러뜨려 놓은 적도 있었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때만큼은 녀석을 저주했는데,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보는 순간, 그만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지금 내 무던한 성격은 전적으로 그 녀석 탓이라고. 중학교 때에, 그야말로 녀석들은 조직적으로 놀기 시작했는데 소위 말하는 학교 간 세력 다툼이랄까. 걸핏하면 나를 앞세우는 녀석들 때문에 늘 피에 쩔어 살아야했던 나는, 혈제(血帝)란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 나는 그야말로 평범한 학교생활을 원했다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모든 생활을 청산한 내게 학교 놈들이 그렇게 떠는 것도 다 그 재수없는 별명 때문인 것이다. 신기한 건, 내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녀석들은 조직놀이(녀석들에겐 그저 놀이였을 뿐)를 접었는데 마치 나를 가르치려고 다른 학교들을 모두 제압했던 건가 싶어 순간 아연해졌었다. 녀석들이 미쳤다는 걸 그때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녀석들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건 그 후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어울리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때엔 모두 이해가 됐었던 건, 이미 나도 어쩔 수 없이 녀석들에게 물들어 버렸던 이유 때문이리라. 계원이 자식이 실제로 지하조직 사천(死闡)의 후계자란 얘길 들었을 때는, 아아 될대로 되라란 기분. 나는 그때서야 겨우, 녀석들에게 친구로서 인정을 받았던 거다. 평범한 교수의 자식인 나로서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세계를, 녀석들은 훨씬 이전부터 살아오고 있었다. 화인이 자식이 G.K 그룹 회장의 손자란 것도, 충두 놈 아버지가 국회의원 정현권이란 것도 녀석들에게 물들기 전의 나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을 사실-. 그야, 차원이 다른 세계인걸, 뭐-. 밥을 먹고 거실바닥에 드러누워 있으려니 참 조용하다. 아까부터 울려대던 충두 놈일게 뻔한 핸드폰 벨소리도, 이제는 잠잠해져서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린다. 충두자식, 한동안은 갈구겠지만 왠지 지금은 녀석들하고 마주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아직 완벽하게 녀석들 같지 않다. 나는, 돌아갈 곳이 다르다. 지금은 학교라는 공통분모가 그 차이를 억눌러주지만, 그것은 영원할 수 없는 것. 당장 1년만 지나면 곧 졸업인 것이다. 그래선가, 나는 늘 너희를 떠나는 나를 상상해왔다. 너희들이 떠나는 게 아니야, 내가 떠나는 거지.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머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옳지 않다. 나는 아직 녀석들과 다른걸. 아마도 영원히 같을 수는 없을 거다. 되도록 너희와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야, 정충두. 나는 본질적으로 너희와 같지는 않아. 물론 다르지도 못하지, 그게 문제야. 녀석들이 내 반항적인 학창시절의 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것. 나는 사실, 그 사실이 아직은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다. 10년을 같이 해 왔지만, 나는 이렇게나 독한 놈인 것이다. 그 머리 좋은 녀석들은, 모른체하고 있는 부분. 충두 놈의 잔소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녀석들의 나에 대한 서운함. 미안하지만, 권화인. 나는 네게 이번일로 화내지 않을 거다. 그냥 평소처럼 웃어 줄거야, 그러니 이놈들아. 오늘은, 그냥 좀 놔두라고. Call the turn 5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거실 바닥에서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어두워진 후였다. 나, 불도 켜두지 않고 있었던가? 더듬더듬 불을 찾아 키면서 아까부터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이때. 그러고 보니 벨소리에 깬 거로군. 인터폰으로 다가가면서 베란다를 보니 비가 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내리는 겨울비라니, 타이밍 한번 기막히다. 인터폰에 맺힌 영상에 다시 동작 정지-. 하아, 지금 뭐하자는 거냐, 사기연. 지저분한 삼각관계라도 만들자고? 우산도 없는지 비에 홀딱 젖은 채로 떨고 있는 사기연. 불쌍한 도둑고양이지만, 찾아갈 곳이 틀렸어. 권화인 집은 3분쯤 더 가야 한다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되는대로 주워섬겼지만 정작 사기연이 집을 잘못 찾았을 가능성은 제로. 두어 번 녀석을 집으로 데려온 적도 있었으니, 나도 어지간히 녀석에게 관대했었군. 한숨을 쉬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발이 끌리는 걸 보니, 나 나가기 싫은가보다. 하지만 녀석을 집에 들일 수도, 더 이상은 없으니. 신경질적으로 문을 여니 동그란 갈색 눈동자가 올려다본다. 얼굴은 평소보다도 창백해져 있지만, 설마 저도 동정을 바라진 않겠지. “어쩐 일이냐, 사기연? 너한테 맞은 뺨이 아직도 아프다고.” “....거짓말.” “뭐?” “넌, 조금도, 아프지 않잖아.”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는 게 신경 쓰인다. 흠뻑 젖은 교복이 눈에 들어와-, 대체 지금껏 뭘하고 온건지. 녀석을 안을 때도 이렇게 왜소한 체격인 걸 몰랐는데, 참 작은 녀석.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왜, 희정이랑, 잔거야?” 다소 짜증스럽게 내뱉자 흠칫거리며 말하는 투가-, 나 결국 그거 때문에 맞은 거냐? 네가 희정이년과 아는 사이였던 건 그렇다 치지만, 내가 너랑 사귀기라도 했다는 말투는 거슬리는 군. “뭐냐, 너-. 꼭 바람난 남편 타박하는 꼴처럼. 남자보다야 여자를 안는 게 당연하잖아.” 이제는 아예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녀석을 보자니 피곤해져서 현관 벽에 몸을 기대는데, 이거야 완전 악역이로군. 아봐, 사기연. 그만하고 돌아가. 나 너 우는 거 별로 안보고 싶다. 발톱 숨긴 도둑고양이한테 한번 물렸으면, 차고 넘칠 경험이라고. 옅은 갈색 머리를 흘러내리는 빗물. 네 젖은 흰 볼에도 그새 고여 있던 빗물이 또르륵. 시리게 쳐다보는 물기어린 눈동자가 파르르. 화인이 자식 입술에 닿았던, 그 붉은 입술이............, 젠장. “너 공부 잘한다며? 머리 좋은 놈이 왜 이래? 서로 피차 장난이었던 거. 뺨 맞은 건 넘어가 줄테니 눈에 띄지 말아라.” “.......자, 장난?” 멍하니 되풀이하는 사기연을 그대로 두고 문을 닫아 버렸다. 네가 진심이었다는 착각,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너한테 느꼈을 가당치도 않은 배신감을 포함해서-너도 나도 충분하잖아? 어쩌면 나도 조금쯤 진심이 될 수도 있었을, 너라는 존재-내겐 다행인지도. 머리를 울리는 빗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새삼 반가워져서, 아직 되돌아가는 네 발소리 듣지 못했어도 나는 그렇게 쉽게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너는, 전화만도 못하단 소리다, 사기연.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나 독한 놈이란 말이야. 수화기를 들며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시. 나, 꽤 잤구나. “여보세요.” “이 씨발 개새끼야! 너 왜 핸드폰 안받아?!” 아차. 충두 새끼다. 핸드폰을 안받았더니 집으로 했나본데-, 낭패다. 생각없이 받았더니- “자고 있었다. 핸드폰 소리, 못 들었는데. 밧데리가 다 됐나보다.” “이런 씹새가. 어서 구라를 까.” “진짜야, 짜식아. 내가 니 지랄맞은 성격 아는데 어떻게 감당하려고 일부러 안받았겠냐고.” “빌어먹을 새끼. 나오기나 해. 여기 이시스다.” “아, 나 오늘은 좀 몸이 안 좋아서 안 되겠다.” “비 맞았냐? 감기야?” “.....바닥에서 그냥 잠들어서 그런지, 조금.” -뚜우- 암튼 성질 급한 충두새끼. 끝까지 사람 말을 들은 적이 없지. 그러고 보니 정말 어지러운 게, 감기가 오려나? 하지만 방까지 가기도 귀찮다. 이번엔 소파에서 잠이 들면서 사기연이 떠올랐다. 쳇, 빌어먹게 약한 자식. Call the turn 6 “야, 아프다는 새끼가 왜 소파에서 자고 있냐?!” 왠지 흐릿한 시야에 충두 놈이 보인다. 가죽 소파의 한기가 그제야 느껴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들어왔냐?” “담 넘었다.” 태연하게 말하는 충두 놈. 이 새끼야, 그거 범죄야. 몸을 일으키는데 어찔한 게, 아무래도 감기가 들긴 들려나. 왠지 목이 아프기도 해서 얼굴을 찡그린 듯 하다. “많이 안 좋냐?” 낮은 목소리....맙소사, 계원이 너도 담 넘었냐? 그제야 충두 놈 뒤에 계원이 놈을 보면서 나는 황당해졌다. 저 모범생의 탈을 쓴 능구렁이 같으니라구. “여긴, 왜 왔냐?” “이 씹새가! 걱정되서 왔더니.” 충두 놈이 발끈하는 게 느껴졌지만....나는 지금 열로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잖아, 보통의 친구사이에 고작 감기기운 있다는 거에 뛰어 온다는 건. 나는 아직도 늬들한테 뒤 봐줘야 되는 꼬맹이냐? 왠지 머릿속이 웅웅거리는 느낌....... “.........권화인은?” “.......오늘 이시스에 없었다.” “.......그러니까 사기연하고 자느라?” -움찔 두 놈의 몸이 동시에 멈칫하는 게-, 다른 상황이었으면 꽤나 재밌었을 듯. 그 표정변화 없는 소계원까지 저렇게 당황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니놈들은 알고 있었던 거잖아. 녀석의 ‘봐 준다’는 의미를. “녀석이........, 그런 취향이었냐?” “한비류, 그건.......” “그만해, 정충두. 한비류, 몸이 안 좋으면 병원가자.” “권화인이 사기연을 좋아했냐고!” 온몸의 열이 머리로 몰린 기분이다. 스스로 흥분해있는 건 아는데, 걷잡을 수가 없어... 이래서 오늘은 니새끼들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만큼.......그새끼에게 진심이었냐?” 충두놈이 화난 표정으로 외치는 게 의아하다. “사기연 그 걸레 새끼가 그렇게 좋아, 씹새꺄!” “그만해, 정충두!” 얼굴을 붉히면서 멱살을 잡아오는 충두놈도, 포커페이스를 일그러뜨리며 녀석을 말리는 계원이놈도, 모두 현실이 아닌 듯 몽롱하기만 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니가 싸대기만 안 맞고 왔어도, 화인이 자식, 안 그랬다.” 멱살을 거칠게 놓고는 뛰듯이 나가버린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너........그래서 화인이 다시 안볼거냐?”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주저앉은 내게, 계원이 자식이 물었다. 이마가 타는 것같이 뜨겁다. 뭔가, 얘기에 초점이 맞질 않아..... 계원이 놈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다시 멀쩡하게 잘생긴 무표정으로 돌아가서 충두 놈이 박차고 나가버린 현관으로 향했다. “아프면, 전화해라.” 문을 닫기 전에 녀석이 담배를 빼어무는 것을 본 것도 같다. 역시 과묵한 녀석이라 저런 행동도 멋있는 건가하고 다소 엄한 생각을 했다.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녀석이 문을 닫고도 한참 후. 그러니까, 나는 단지.......내가 깔았던 놈을 안을 수 있을 만큼, 권화인에게 나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가해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네놈들에게 역시 난 또 그정도인가 해서. 뭐야, 나 단지 서운했던 거잖아. 그런데 그게 화낼 일이냐? 빌어먹을 새끼들, 이해 못할 얘기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또 정신이 아득해져서, 확실히 열이 나는구나했다. 담 넘어 들어와선 현관문으로 나간 녀석들이 문을 잠그고 나갔을 리 없는데, 현관까지 나갈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서 누워버렸다. 꿈 속에선, 사기연이 비 맞은 채로 울어대고, 권화인이 사기연한테 키스하고, 충두놈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계원이 놈은 안타까운 듯 담배를 피어대고....... 모든 게 너무 복잡해서, 오지게도 머리 나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 좋은 놈들은 이래서 상종하기 싫다니까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네 놈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왠지 마음이 조금,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Call the turn 7 다른 날과 다름없는 아침........, 아니구나......벌써 점심때가 다 됐다. ......그러니까 간만에 학교를 제낀 건가? 푸른 커텐 사이로 새어들어 오는 빛이 눈부셔서 소파 위에서 잠시 꿈지럭댔다. 날은 개어있었다. 그리고 열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민망스러울 곰같은 체력같으니. 충두 놈이 할법할 얘기를 주워섬기고는 혼자 웃었다. 깔끔한 거실을 둘러보며 그새 가정부 아줌마-그러니까 그 통통한 얼굴의- 가 다녀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식탁에는 어느새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시끄럽게 12시를 알려대는 목각 뻐꾸기는 어제도 그랬듯 먼지 하나 없다. 그러니까 다른 날과 다른 바 없는, 일상. 여전히 바쁘신 부모님은 들어오지 않았고, 한심스러운 양아치 아들은 학교에 결석을-. 아니, 결석은 오랜만인데? 소파 밖으로 기지개를 펴듯 다리를 내어놓으며 나는 왠지 나른해졌다. 아야, 목이 아프다. 몸도 구석구석 쑤시고...... 빌어먹을 소파같으니! 중학교 때 이후론 소파에서 자본적은 없다는 걸 희미한 기억 속에서 떠올리고는 이마를 짚었다. 대체 180이 훨씬 넘는 녀석이 소파에서 잘 수 있다니! 자면서도 불편하지 않았단 말인가... 삐그덕대는 근육통에 미간을 접으면서 소파에서 일어섰을 때 희미하게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지만, 핸드폰을 2층 방에 던져뒀던 걸 떠올리고 패스-. 누군지 몰라도 그만 걸어대라. 귀찮다고. 샤워를 하고 슬렁슬렁 옷을 입었다. 딱히 갈 곳도 없지만(너무 이른 시간이므로) 그대로 집에 있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물론 학교에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화인이 놈의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도피일지도 모른다고, 밤새 열어뒀던 현관문을 그제야 잠그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열쇠를 따로 가지고 있는 가정부 아줌마는, 문도 그대로 두고 갔었다...아무리 청소와 밥 외엔 아무것도 터치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하지만 그런 스스로를 차게 비웃으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마주할 생각은 없었다.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오래 묵은, 처치 곤란할 만큼 복잡한 일이라면 더더욱. 목적지가 딱히 없는 만큼 느긋하게 발을 놀리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일부러 두고나온 핸드폰은, 한편으론 홀가분하고 허전했다. 불편한 만큼 아쉬웠고, 아쉬운 만큼 시원했다. 어느새 핸드폰을 화인이 녀석들로 대치시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녀석들이 꼭 그랬다. 누구누구는 우정에 목숨도 건다지만. 아직도 어느 술집 한구석에서는, 의리를 외치며 소주를 원샷하겠지만. 그리고 분명, 녀석들은 내 인생 둘도 없이 소중한 녀석들이지만. 하지만, 그게 뭐? 나는 내가 녀석들과 함께 할 남은 시간, 딱 그만큼만 녀석들 일로 머리 아플거다. 그러니까 단지 일년-. 아니, 일년하고 몇 달-. 단지, 겨우, 그 정도. 아니, 문제는 바로 그거잖아. 내가 녀석들을 떠나려는 거. 그걸 녀석들은 늘 그랬듯이 모른척하지 않았던 거고. 나는 웃기게도 떠나려는 주제에 친구 대접 안한다고 서운했던 거고. 문제는 사기연이 아니었던 거다. 화인이 녀석이 사기연한테 키스했던 것도 아니고, 사기연이 비에 홀딱 젖은 채로 내 집 벨을 울려댔던 것도 아니고, 고작 감기란 소리에 필시 술 마시다 뛰어왔을 충두와 계원이 자식들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건, 단지 나의 문제. ‘뭐야, 간단하잖아’하고 나는 웃어버렸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가져오지 않은 핸드폰이 문득 견딜 수 없이 허전해졌다. “아마도, 학교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인 그녀는 내 호출에 별말없이 나와주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웃었다. 그녀는 늘 예뻤고, 편안했으며, 현명했다. 그러니까- 여러 의미로. “강의 있었던 거 아니야?” “있어도 빠지라고 했을 거잖아?” 붉게 화장한 입술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직 이른 시간의 커피숍은, 흘러나오는 오래된 팝송처럼 나른했다. 내 앞에 앉은 그녀, 현주연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고보니, 오랜만이군.” “네가 사기연인가하는 녀석 만난 뒤론 처음이야.” “그랬던가? 기억 안나.” “맞아, 바보야. 너 전화하면 항상 걔랑 있었잖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가 더불어 보내는 장난스런 눈빛에 호기심 이상은 없는 것처럼, 갑작스레 불러내는 내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 것만큼, 그녀는 훌륭할 정도로 현명했다. “어때? 너네 집 비었어?” “지금은 너무 일러.” 입을 가리며 웃는 그녀의 손톱이 붉다. 따라서 의미없이 웃어주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얼굴을 보니 아침부터 땡겨서 온 건 아닌데, 학교는 왜 빠졌어?” 빌어먹을. 그녀는 지나칠정도로 호기심이 많다. 더구나 눈치도 빠르다. 내게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정. “너무 즐거워 보이는데.” “그야, 즐거우니까.” 어깨까지 닿는 검은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맙소사, 그녀는 진심이다. “사기연 문제니? 그치, 그치?” “시끄러워.” “빼지말고 말해봐. 걔가 어쨌는데? 응?” 아아, 편한 상대라는 말 역시 수정. 정은이나 찾아갈걸. 오랜만이라고 몇분 징징대다 조용했을 텐데. “뭔진 모르지만, 너로서는 심각한 고민이구나?” 이내 포기한다는 투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심각한 고민? “무슨 소리야?” “너처럼 단순한 애가 이렇게 고민하니까 말야. 누군지 행복한 놈이네. 천하의 한비류 마음을 다 얻고.” 던힐을 꺼내물며 그녀가 말했다. 지포라이터가 불을 뿜어내기까지 나는 어처구니없이 황당해졌다. “아니, 대단한 놈인 건가?” “웃기지마. 누가 작가 지망 아니랄까봐 소설 쓰냐?” “흐응, 넌 잔인해.” 그녀가 콧등을 찡그려보이며 말했다. 손끝에 매달린 필터에 붉은 입술 자국이 묻었다. “야, 일어나. 못참겠다.” ‘아직 이르다니깐’하면서도 따라오는 그녀에게 웃으면서 커피숍을 나섰다. 소중한 사람? 큭큭. 개나 주라 그래. Call the turn 8 주연의 오피스텔을 나왔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라 어느새 하늘엔 별마저 반짝이고 있었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드물게 많이 보이는 별이, 새삼 시꺼먼 사내놈 가슴에 불을 지필 리도 없지마는 고개를 젖히고 꽤 오래 서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한숨과도 같아서 내심 웃어버렸다. 아아, 한비류가 드디어 돌아버렸나. 비가 오고 난 겨울의 날씨는 눈에 띄게 서늘해져서, 생각 없이 걸치고나온 얇은 자켓이 한심해졌다. 아무래도 나은 줄 알았던 감기기운이 다시 오려는 듯,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어설프게 기침을 하면서 택시를 탈까하다가 오가는 택시가 없어서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여전히, 발걸음은, 느긋했다. 그러고보니 화인이 놈을 만났을 때가 이맘때쯤이었다. 7살이었던가? 교수였던 부모님은 지금이야 망나니 같은 아들, 포기해 버린 지 오래지만 그때는 꽤나 나름의 기대란 것을 하고 있어서 조기교육이랍시고 배우던 것도 한가득. 나야 물론 지금도 바닥을 기는 머리이니 그때라고 특별히 뛰어났을 리 만무. 하지만 엄청난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던 나는 싫다는 소리도 못하고 죽어라 공부만 했어야했다. 그중에서 특히 질색이었던 건 일어였는데, 걸핏하면 귀를 잡고 흔들어대던 여선생이었던 탓에 -더구나 못생긴- 그 시간은 소심한 내겐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만화영화를 보느라 미처 숙제를 하지 못해서 과외 시간이 다가오자 숙제였던 프린트를 붙잡고.......................날랐다.-_-;; 그것도 놀이터로. 딴에는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막상 문제를 보니 앞이 캄캄. 거듭 말하지만 나는 무척 소심했으므로. 아무리 미화시켜서 잘 생각해보려고 해도 난 쪽팔리게 놀이터의 모래 위에 앉아 서럽게 울어버렸던 듯 하다. 그것도 연필의 흑연이 얼굴에 까지 검게 묻은데다, 숙제였던 프린트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로. 그때 다가온 녀석이 화인이 놈이었는데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때 녀석의 버릇이었다- 다가오더니 내가 끌어안고 있던 프린트를 대신 풀어줬던 것이다. 나는 울다가 웬 놀랍도록 예쁘게 생긴 녀석이 -나보다 녀석이 컸다는 건 충격이었다- 어려운 일어 독해를 술술하는 것에 놀라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녀석은 계속, 내 부모님이 자신들의 재능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자식을 인정할 때까지 일어를 비롯한 다른 숙제를 모두 해주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의 녀석은, 지금과는 180도 달라서 잘 웃는 녀석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 말도 잘 안하는 녀석이었다. 늘 멍-한 표정에 가끔씩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까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귀엽다고 뒤로 넘어갔을 정도. 실제로 녀석과 만나던 놀이터에는 녀석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때부터 녀석의 인기는 엄청났다. 연령대도 다양했는데 흰머리의 할머니부터 젖먹이 간난아이까지- 정작 녀석의 볼이라도 만질라 치면 엄청나게 험악해지는 놈의 표정 때문에 그들은 늘 주위반경 1m이상을 유지해야만 했다. 녀석이 그나마 말을 하는 상대는 나뿐이었다. 사실, 녀석의 옷차림이나 행동은 도저히 놀이터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고, 녀석이 놀이터에 매일 오는 것도 나 때문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녀석은 미끄럼틀과 시소는 물론, 제일 인기가 많아 또래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던 그네에 엉덩이를 들이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녀석의 도움을 받던 어느 날, 녀석이 친구들을 데려왔는데 물론 그 두 녀석이 충두와 계원이 놈이었다. 그 녀석들은 처음엔 나를 무척이나 띠껍게 -당시의 나는 소심함의 특권이었는지 눈치가 빨랐다- 대했다. 충두는 눈에 보일 정도로 나를 괴롭혔고 -가령 모래를 뿌린다던지 그네를 타고 있으면 밀어버린다던지- 계원이놈은 나를 거의 무시-무시라곤 하지만 녀석의 포커페이스는 당시엔 완벽하지 않아서 녀석의 나에 대한 경멸이 그대로 드러났다-했다. 녀석들은 화인이 놈과 함께 왔다가 녀석이 내 숙제를 하는 동안 마땅찮은 표정으로 예의 그 모습을 주시하다 숙제가 끝나면 쏜살같이 화인이 놈을 데리고 가버리곤 했다. 나야, 숙제만 해주면 장땡이었으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더구나 충두는 인형처럼 예뻤지만 사나웠고, 계원이는 잘생겼지만 무서웠으므로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것이 변했던 건, 그 다음다음해인 아홉 살 때. 또래보다 작았던 데다 내성적인 나는 대단치 않은 괴롭힘을 당하곤 했는데 그 날도 마침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어, 한비류~ 이런 데서 다 만나네?” 그날은, 정말 재수가 없었다. 평소에 나를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같은 반 놈을 화인이 자식을 기다리고 있던 놀이터에서 만나버렸으니까. 더구나 그 비계 덩어리는 친구라고 붙어있는 세명에게 자신을 얻었는지 한층 잔인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서 끝내고 그 돼지새끼가 사라져주기만을 바랬다. “손에 든 건 뭐냐?” 인간은 그렇다. 어떠한 욕설보다도 무시가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돼지 새끼는 나의 수준 높은 반응을 이해할 만큼 지능이 높지 않았다. 하긴, 괜히 돼지새끼겠냐고. 돼지새끼는 살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눈을 흡뜨고는 징그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역시 나로서는 상대되지 않는 힘으로 손에 꼭 쥐고있던 프린트를 빼앗아갔다. 나는 소심했을망정 나이에 비해 조숙했기 때문에 그런 유치한 행동에 한숨을 쉬어버렸다. “돼지새끼야, 그거 주고 꺼져.” “뭐?” 다시 말하지만 그 당시 난, 소심했다. 앞의 말은 고로 내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녀석을 묘사하는데 -일명 돼지새끼- 동질감을 느끼면서 돼지새끼 얼굴이 온통 붉어진 것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잔뜩 불량한 표정을 지은 충두(하지만 웃기게도 귀엽게만 보였다)와 팔짱을 끼고 또래보다 벌써 훨씬 큰 키로 내려다보고 있는 계원이가 있었다. 돼지새끼가 비교적 평균 신장에서 웃돌지만 절대 험악해 보이지 않는 충두 놈에게 쫄았을 리는 없었다. 그때엔 지금도 내게 오한을 느끼게 하는 입술에 옷핀도 없었고, 귀에 수를 셀 수 없는 피어싱은 물론이고 머리도 붉지 않았던 것이다. 따지기로 한다면 충두 놈 보다야 그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선 계원이 놈이 훨씬 놈들에겐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역시 돼지새끼와 그 똘마니. 생각이란 게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패. 얼굴에 모래와 눈물을 잔뜩 묻히고 도망가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래도 내일부턴 더 괴롭힘을 당해야할 것 같다, 라고. 한숨을 쉬면서 녀석들이 떨어뜨리고 간 프린트를 주웠다. 그 순간은 녀석들의 괴롭힘보다도 더러워진 프린트가 더 걱정이었다. “새끼야, 넌 고맙다는 말도 없냐?” 나는 프린트에 묻은 흙을 털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충두 놈은 좀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그네에 한쪽 발을 올린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왜이래!!” 나는 녀석이 새삼 귀여워져서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지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버벅대는 모습이 재밌어서 발꿈치를 든 그 힘든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해야만 했다.(그때는 충두 놈조차도 나보다 컸기 때문에) “고마워.” “뭐?”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 화를 내야할지 고민하던 충두는 물론이고 그 옆에서 예의 우리를 주시하던 계원이 녀석까지 그때엔 경악한 표정이었다.(어째서 그렇게까지 놀란 건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테리) 어쨌든 녀석들과의 관계가 달라진 건, 아마도 그 일 이후였는데 화인이 자식은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 것에 오른쪽 눈썹을 한번 들어올려 보이더니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었다. “에취!” 감기가 단단히 들려는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감겨드는 바람이 차다. 걸음을 빨리하면서 얇은 자켓을 여몄다. 다시 한번 날씨를 저주하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핸드폰이 없으니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시계는 안키우기 때문에- 주연의 집에서 나왔을 때가 10시 즈음이었으니 그보다 20분쯤 후? 집 앞의 가로등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보여 발을 멈췄다. 녀석은 붉은 담장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서 빙글 돌려대고 있었다. 아직 교복차림인 녀석의 호리호리한 몸을 보면서 새삼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로등에 빛나는 탈색한 머리카락이라던지, 피하지 않는 검은 눈이라던지, 한쪽 어깨에 흘러내릴 듯 메어져있는 가방마저도 녀석 다운 것. 그러니까, 문제인거야. 니 놈이 이렇게 아름다워서, 나 좋다고 쫒아 다니던 도둑고양이까지 홀리게 만드는 너라서, 잔뜩 화나있던 나까지 누그러지게 만드는 너라서, 빌어먹을, 조금만 더 피하게 해주면 안 되는 거였냐? 나는 네 놈 때문에 학교도 쨌는데. 핸드폰도 두고 다니느라 불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일어나자마자 주연이한테로 도망가서 생각도 없던 섹스하느라 피곤해죽겠는데. “이제 오냐?” 녀석이 예의 피식거리는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잘근잘근 씹어 뱉어버린 담배가 녀석 다운 행동은 아니다. “아프다면서 그렇게 입고 어딜 갔다 오냐?” “......오래 기다렸냐?” “4시간 정도?” 아, 미친 새끼. 이렇게 추운데! 그러고 보니 잘생긴 얼굴은 이미 파랗게 얼어있다. 그런데도 녀석은 입가를 끌어 웃는다. 녀석의 비웃는 듯한 웃음이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없었다. “씹새꺄, 없으면 가야할 거 아냐!”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면서 녀석을 끌어당겼다. 교복 마이가 놀랍도록 차가워서 더욱 힘주어 끌어버렸다. 진짜 돈 놈. 미친놈. 아, 어쩌다 이런 새끼랑 얽혀서! “큭큭, 걱정하는 거냐?” 녀석이 음침하게 웃는다. 녀석은 꼭 그랬다. 그냥 입가를 끌어올려 피식, 이거나 이렇게 낮게 큭큭대거나. 무표정이었던 어렸을 때와는 또 다르게 녀석의 표정은 알 수 없다. “야, 이거라도 두르고 있어.” 허둥지둥 집으로 들어와 보일러를 올리고 이불을 가져다 녀석에게 던져줬다. 화인이 놈은 분홍색 이불을 멀뚱히 보더니 피식하고 웃는다. “씹새야, 그거 내꺼 아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아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렴 내가 그런 이불을 덮겠냐? 중간중간 하트까지 있는 무늬를! 가정부가 멋대로 사다 놓은 거란 말이다! “아프다는 건 괜찮냐?” “고양이 쥐 생각 하는구나.”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 빌어먹을 새끼. 그래도 걱정은 됐나보지? 꼭 제 놈 때문에 아픈 건 아니었지만(자존심상 인정할 수 없다) 사기연 놈을 홀랑 먹어버린 건 네가 미안해 할 일이 맞다. “됐어, 새꺄. 사기연 일은 나 더 터치 안한다. 역시 여자가 낫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고...만지고 싶은 가슴도 있고.” “.....깔리고 싶진 않냐.” “뭐?” “농담이다.” 피식, 하고 또 웃어버리는 게 한대 패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화가 나서 한번 붙어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휘이 저어버렸다. 저 놈은, 안된다. 한번 돌면 무서운 놈이기 때문에. “어디 갔다 왔냐?” 소파에 앉아 이불을 무릎위에 올린채로 묻는 화인이 놈. 이놈은 묘한데서 집요하다. “알아서 뭐하게, 새끼야.” “큭큭. 한비류, 많이 컸다?” 아, 망할 자식. 또 열 받았다. 대체 내가 뭘 또 어쨌다고 지랄인지. 솔직히 지금 빌어야 할 건 너 아니냐? “한 가지만 묻자. 너 사기연하고 안 잤냐?” 녀석이 버릇대로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저런 걸..그래, 섹시하다고 해야 하나? 한비류,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애 저녁에 버린 녀석에 대한 환상을 왜 새삼 헤집고 난리냐. “자진 않았고 깔긴 했다.” 씨발. 알고는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들으니 열 받는 건 사실이다. 어느 놈이 안 그러겠냐고. 더구나 내가 한 키스마크의 붉은 기도 가시기 전에 하필 이놈한테 안긴 사기연, 그 개자식! “휴우, 그럼 오늘 온건 사과하려고 온 거 아니냐?” “아닌데?” 뿌득. “......그럼, 왜, 왔냐?” “..........” 대답은 안하고 눈을 맞춰오는 화인이 놈. 녀석의 속 쌍꺼풀진 눈이 가늘어지며 검은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녀석의 눈은, 그랬다. 빛도 통과시키지 않을 만큼 칠흑같이 검어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름다운만큼 강한 검은 빛은, 정작 홀리는 것은 저인 주제에 암담할 만큼 무심했다. “......화났냐?” 이 놈, 분명 약 올리러 온 거 맞다. 하루 종일 이런 놈 때문에 고민했던 내가 미친놈이다. “됐어. 좀 화냈더니 충두 자식은 멱살 잡아오고, 계원이 놈은 싸늘하게 굳어버리고. 빌어먹을 자식들, 상대가 바뀐 거 아냐? 니가 맞아야 되는 거잖아!” 괜히 억울해져서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녀석들이...........때렸냐?” “뭐?” “충두 새끼가 때렸냐고!” 갑자기 안색을 싸늘히 굳히는 녀석 때문에 내가 다 놀라 버렸다. 니미럴, 더럽게도 감정 변화 빠른 녀석. 멱살 잡혔댔지 언제 맞았다고 그랬냐! 그리고 내가 아직도 늬들이 때리면 맞을 약체로 보이냐. ..........흠, 그래도 내가 맞았으면 너도 인간인 이상 미안하긴 한거냐? “맞긴 누가 맞아, 새꺄.” 그제야 표정을 푸는 것이..........왠지 뿌듯하다. 짜식, 양심은 있었구나. “근데 대체 사과하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 왜 온 거냐?” 왠지 기운이 빠져서 가죽 소파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목이 따끔따끔해 와서 뜨거운 차라도 끓일까하고 일어선 것인데 내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녀석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진짜, 너 뭐 하러 온 거냐? 뜨거운 코코아라도 타주랴? “아팠다는 자식이 핸드폰도 안되길래 뒤졌나했지.” “새끼, 말을 해도 꼭-.”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녀석. 나는, 그럴 때가 제일 좋았다. 녀석이 오랜 버릇대로 평소엔 눈까지 덮이는 노란 앞머리를 쓸어 넘길 때. 긴 손가락의 나른한 움직임보다, 그럴 때면 드러나는 잘생긴 곧은 이마보다, 은연중에 내리까는 눈꺼풀에 매달린 긴 속눈썹을 보는 게. 그 검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볼 수 있는 게. 왠지 잊었던 열이 오르는 듯 해 잠시 휘청였다. 역시, 오늘 외출은 좀 무모했나. 새삼 몸 상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화인이 녀석 품 안. 날쌘 녀석. 언제 일어난 거냐. 몽롱한 시야에 보이는 녀석은 평소의 묘한 미소도 없이 일그러진 표정. 왠지 얼굴이 붉어져있는............맙소사, 말도 안돼! 열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으면서 든 생각은, ‘미친 한비류, 쪽팔리게 감기로 정신을 잃냐’였다........=_=;; Call the turn 9 -한비류, 학교 갔다 와서 보자. 튀면 죽인다. 머엉. 아침에 잔뜩 아픈 몸으로 일어나 침대 맡에 이런 쪽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것도 절대 농담이 아닌 게 느껴지는 -종이가 뚫릴 듯이 힘주어 쓰인- 종이를 앞에 두고. 휴우. 이건, 절대적으로, 상황이 바뀐 거라고. 내가 뭣 땜에 이런 협박을 받아야 하는 거냐. (물론 녀석의 말은 무슨 말이건 협박으로 들리는 특성이 있었다. 특히 입가를 비트는 미소를 지을 때면 더더욱. 그리고 나는 녀석이 쪽지를 남기면서 어느 때보다 힘주어 웃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했다.) 하지만 지난 밤 간간히 열에 들뜬 눈에 흐릿하게나마 화인이 놈 형체를 본 듯도 해서 난감해지고 말았다. 설마, 어울리지 않게 간호한다고 밤샌 건 아니겠지?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듯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 달린 욕실로 향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지만 찝찝해서 그냥 있을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증기로 흐려진 유리를 닦으면서 가만히 스스로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눈 밑이 검은 게, 확실히 아픈 티가 난다. 사내자식치고 흰 편인 피부 탓에 눈가에 다크써클이 더 선명해 보이는 듯도 해 한숨이 나왔다. 이 흰 피부는 유년기의 유일한 유산이다. 그러고 보니 184cm였던가, 학년 초에 쟀던 키가. 여전히 화인이 놈 보다는 3cm정도 작았지. 이젠 자신이 제일 작다는 것에 발광-ㅁ-을 해대던 충두 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녀석은 키를 재던 선생까지 위협해가며 다시 재볼 것을 종용했다. 그래봤자 떨리는 목소리로 교사가 불렀던 180cm는 적어도 2~3cm는 뻥튀기 된 값이란 걸 우리는 알았다.) 욕조에 물을 채워 넣고 들어가 앉으면서 새삼 세월을 가늠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프면 감상적이 된다더니’하고 고개를 저어버렸다. 하지만 뜨거운 물에 나른해진 정신은 이미 의미 없는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제일 친했던 건 충두 놈이었다. 화인이 놈은 원체 알 수 없는데다 묘하게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이었고, 계원이 놈은 거듭 말하지만 무표정에 무응답을 모토로 살고 있는 놈이라서. 지랄 맞은 잔소리의 소유자인 충두 놈은 의외로 꽤나 나하고 잘 맞았다.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천성이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두놈보다야, 확실히 그랬다. 친하다고 해야 할까........정정, 잘 맞았다는 편이 맞겠다. 고작 넷이서 뭉쳐다녔는데 누가 누구와 더 친하다는 표현 따위 어울릴 리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재미없는 화인이 놈과 계원이 놈보단 충두 놈이 편했다. 녀석은 말이 많은데다 다혈질이지만 의외로 남자다워서 -그 무시무시한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교적 공통점이 많았다. 그건, 그러니까 화인이 놈과 계원이 자식이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말하자면, 입에는 욕을 달고 살고 뻑하면 주먹을 날려대는 주제에 누구보다 정이 많은 녀석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인 거다. 그래서 녀석이 내 목덜미를 잡아채 얼굴을 붉힐 정도로 화를 내도 나는 녀석에게 진심으로 화낼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그 놈은 화인이와 계원이보다 아주 조금은 더 소중한 놈이기 때문에. 씻고 나오니 한층 상쾌해져서 기분이 좋았다. 가정부 아줌마가 왔는지 1층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 걸린 벽걸이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 한 후에야 이틀 연속 학교를 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고작 감기 때문에 학교를 빠지고 거기다 기절까지 했다는 건 확실히 한심하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학교를 가겠냐하면 NO일게 당연하지만. 발에 뭔가가 걸려서 쳐다보니 핸드폰이다. 이미 밧데리가 나간 지 오래인 그것을 보다가 그만 가슴이 덜컥, 해버렸다. 맙소사! 화인이 자식, 이걸 봤으면 의도적으로 핸드폰을 두고 갔다는 것을 알았을 거다. 설마 남기고 간 저 쪽지의 어마어마한 필압은 그래서는 아니겠지, 하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변기에라도 내려 보낼까하는 말도 안되는 고민을 하다가 새 밧데리를 끼워 넣으니 정신없이 울려댄다. 슬쩍 액정을 보니 충두 놈. 다, 다행인건가............가 아니잖아! 이 놈은 내 멱살을 잡았던 놈이라고!!(<-절대 잊지 않고 있다) “.............” “씹새야, 삐졌냐?” 소리없이 전화를 받으니 아무렇지 않게 물어오는 충두 놈. 아, 이 새끼가 그러면 그렇지. 괜히 니놈들이 친구겠냐, 하면서 눈썹을 찌푸려 버렸다. 화인이 자식이나 이 놈이나 동류라는 것을 왜 자꾸 나는 잊는 것일까. “아프다며?” “화인이 놈은?” “옆에서, 자고 있다.” ........지금 수업시간 아니냐? 늬들 다른 반 아니던가? 하긴, 그럴 줄 알긴 했다만. “괜히 진짜 아픈 자식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양호실에서 나오지 그래.” “킥킥, 옥상은 자기엔 너무 춥다고.” “.....계원이 놈도 옆에 있냐?” “그 자식은 수업 들으러 갔다. 그 놈 의리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끼야, 그 자식은 너랑 달리 촉망받는 수재라고. “전교 1등을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냐?” “그 자식 어차피 공부 안해. 그냥 수업 들어주는 거지. 그거 진짜 미친놈이야.”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아, 맞다. 너 진짜 성적 아니지? 대학은 어떡하냐.”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투로 킥킥대는 충두 자식한테 이를 갈면서 핸드폰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을래, 정충두.” “그런 이유라면 나보다도 계원이 놈이나 화인이 놈을 노리지 그래. 그 놈들은 내가 봐도 괴물이야.” “안타깝게도 아직 그 놈들은 내 실력이 딸려.” “씹, 그럼 나는 쉽단 말이야!” 버럭, 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 그래도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아, 이 놈아. 넌 역시 그게 어울린다. “......저번 일은.” “.................” “솔직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 “뭐, 사기연 자식은 화인이 놈한테 넘겼다.” “...........둔해 빠진 새끼.” 아, 진짜 돌겠네. 대체 또 뭐가 맘에 안드는 건데?! “뭐가?” “빨리 결정해. 아니, 늦어도 되니까 제발 긍정적인 결론 내려라.” “씨발, 앞말 뒷말 다 잘라먹고 뭐하자는 건데. 나 니놈들처럼 머리 좋지 않아서 설명을 꼭 들어야겠다. 무슨 소리야?” “니놈 멋모르고 나대다가 깔려도 나는 모른다는 거다, 머저리 새끼야.” “니미럴, 어서 헛소리하고 지랄이야? 깔리다니! 내가 사내놈한테 깔릴 정도로 병신같냐!” “그럼 니가 깔려고? 아서라, 넌 상대가 안된다.” “깔긴 또 뭘 깔아? 나 이제 남자 졸업했다. 맛도 별로야. 여자가 나아.” “개새끼, 둔해 처먹어서 들이 밀어줘도 모르지. 그나저나 몸은 어때?” “내가 애 낳았냐? 고작 감기 갖고 꼭 뭐같이 굴어. 해서 말인데, 늬들 오늘 오지마라. 화인이 놈한테도 전해.” “좆같은 새꺄, 니놈 병원에도 안가고 혼자 끙끙 앓을 거 아는데 어서 개수작이야!” “병원 갈거야, 그러니까 오지마. 니놈들 오면 더 피곤하다고.” “시끄러, 씹새꺄. 닥치고 기다리고 있어. 수업 끝나자마자 날라갈테니까. 어? 화인이 자식이 너 바꾸랜다. 잠깐 기다려.” 절로 피곤해지는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그 쪽지도 모자라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바꾸래. 어제 한숨도 못 잤을 거 뻔한데 잠이나 잠자코 잘 것이지. “야.” “왜.” 녀석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섹시한 건 섹시한거고 -그래, 설사 다시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낮은 베이스의 목소리일 지라도- 저런 식으로 정떨어지게 부르는데 살갑게 대해줄 주변머리따윈 안키운다고. “죽 먹어라.” “뭐?” “아줌마한테 말해놓고 왔어. 안먹으면 죽는다.” -딸칵 “............” 대체 아침부터 ‘죽인다’를 몇 번 들은 건지. 녀석 기분이 별로긴 한 모양인데, 설마 내 탓은 아니겠지.........? 끊겨진 핸드폰 폴더를 덮으면서 달력으로 눈이 향했다. 벌써, 11월.... 조금만 있으면, 곧 고3...... 딱히 고3이란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1년만 지나면 졸업이라는 것이.......... 하아, 유학이나 간다고 졸라볼까? Call the turn 10 “독감이야. 며칠 쉬면 나을거다.” 은테 안경을 빛내며 화인이놈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에도 쫄지 않는 이 의사는, 충두 놈 둘째 형님이시다. 참고로 무척 날카롭게 생긴 미형의 얼굴인데 성격은 미친개 충두놈을 가볍게 제압할 정도. “고마워요, 형. 진료 시간 지난 지 한참인데..” “됐다, 그보다 니 몸 잘 챙겨라. 저 자식들 걱정한다.” 청진기를 접어들면서 슬쩍 내 뒤에 건방진 자세로 서있는 세 놈을 가리키는데 한숨이 나왔다. 저 자식들이 병의 원인입니다! “정충두, 너 자꾸 외박할거냐. 어제도 안 들어 왔지? 비류야, 저 자식 좀 집에 들여보내라.” “씹, 정충기! 비류새끼한테 왜 날 부탁해!” “그나마 늬들 중에 제일 양호하잖냐.” ...........이거 칭찬인건가. “저 자식 언제 제 말 듣는 거 봤습니까?” “하긴, 저 자식이 누구 말 들으면 기적이지.” “씨팔, 뭐하자는 거야!” 발악하는 충두 놈을 가볍게 막아서는 화인이 자식과 계원이 놈. 너무 익숙한 일이라 웃음도 안나온다. “주사는 안 맞아도 됩니까?” “왜, 맞혀주랴?” “하하, 그럴리가........” “진단서 끊어줘, 그 놈 가뜩이나 공부 못해서 내신도 안좋은데 병결로라도 처리해야지.” 아, 충두 새끼, 충기 형 앞에서 쓸데없는 소릴! “됐다, 새꺄. 졸업하면 유학 갈 거다.” 싸아- 뭐냐, 그러니까....... 대체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잔뜩 굳어진 세 놈은 물론이고 충기형까지 얼음이 뚝뚝 떨어질 만큼 딱딱한 표정. “뭐, 뭐야?” “큭, 유학은 아무나 가냐.” 이내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화인이 놈. 하지만, 눈이... “집에나 가자.” 늘 그렇듯이 가벼운 가방만 덜렁 걸친 넓은 등이 돌아서 나가는데, 착각이 아니라면 그 검은 눈이.......... “씨발, 얼른 나와, 새끼야.” 잔뜩 굳은 얼굴로 따라 나가는 충두와 계원이 자식. “뭐야, 아직도 그대로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책상에 발을 올리는 충기 형. “다음에 뵈요, 충기형.” “너무 둔한 척 하지마라, 잔인한 녀석.” 역시, 아까 그 눈은, “벌써 10년이다.” ...............너무 차가웠지? 궁금한 것, 첫 번째. “..........내가 죽을 병 걸렸냐?” “미친자식, 개나 소나 다 걸리는 감기가지고 왠 지랄...” "................" 궁금한 것, 두 번째. “............혹시 내가 여자냐?” “씨발, 네 놈이 여자였으면 나 세상 안 산다!” “............-_-^” .......그래도 유일하게 질문에 답해줬기 때문에 사소한 반응은 덮어두자.(부들부들) 궁금한 것, 세 번째. “.............늬들 약 먹었냐?” “좆같은 새끼, 네놈이 지랄해대서 끊었잖아!” 그래, 그랬지. 근데 왜!! 네놈들이 병간호 한답시고 하지않던 짓거리를 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나 죽을병인 거냐!!! “.......젠장, 아직 안지 못한 년들도 많은데!!” “왜 또 꼴값이야, 가만히 누워있지 못해!” 옆에서 핏대를 올리는 충두 놈 때문에 잠시 멈칫-. 하지만 네놈들이 침대 머리맡에서- 한 놈은 죽을 식히고 있고(충두 자식) 한 놈은 약봉지와 물 잔을 든 쟁반을 들고 있고(계원이 놈) 마지막 한 놈은 칠벅거리는 물수건을 짜고 있는데(화인이 놈)........ 드디어 지구가 망하는 거냐!!! 왜 안하던 짓을 하냐고!!!!! “빨리 나아야 잡아먹지.” 오싹. 왠지 빨간 망토의 늑대가 생각나는... 젠장, 웬 헛소리야, 권화인!! “야!” “느긋하게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큭큭거리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는 화인이 자식. 한숨을 쉬어버리는 계원이 놈과 안됐다는 표정의 충두 놈. 뭔데, 저 자식! 왜 오늘따라 더 검은 오오라를 뿜어대며 웃는 거냐!!! “내일 학교도 갈 놈들이 뭐하는 거야.” “집도 가까운데 무슨 문제야. 아침에 잠깐 들렀다 가면 돼.” 그랬다. 녀석들의 집은 넘어지면 코 닿을 데인 것이다...젠장. “충기 형님 말씀 못 들었냐? 쉬면 낫는다잖아. 나 내일부턴 학교 나간다. 꺼져.” “닥치고 죽이나 먹어.” 식히고 있던 죽을 거칠게 무릎에 올려놓으면서 충두 놈이 소리쳤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해 주는 척하는 거 고맙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분 별로다. 무엇보다.........나중에라도 생각날 것 같다고. 아플 때면 두고두고. Call the turn 11 부모님이 교수인 탓에,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아오긴 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기사가 모는 차 따위 한번도 타본 적 없었다. 그것도 이름도 알 수 없는 길다란 외제차 따위는 더더욱. “주스 마실래?” “됐다.” 역시 일반 서민과의 차인가, 하고 권해오는 주스를 밀어내면서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깟 거 좀 거절했다고 눈썹을 모으는 충두 놈은 패스. 나는 지금 생각할게 많다고. 지금 내 옆과 앞에 자리 잡은 녀석들은 정말로 우리 집에서 날밤을 깠다. 독한 놈들... 같이 밤을 보낸 기억이야 셀 수 없이 많다지만 맨정신으로 그것도 병간호를 이유로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클럽에서 술병을 끼고 새벽까지 마셨던 게 대부분. 더구나 녀석들은 반항할 여지없이 나를 끌고 화인이 놈네 차에 구겨 넣었는데 내 생전 이런 차타고 학교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평소엔 기를 쓰고 녀석들의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서 도망 다니던 나였기 때문에. 하지만, 고작 10분되는 거리를 차타고 가야할 만큼 아픈 건 아니라고. 정말 뭣같이 취급하는군. “끝나고 기다려.” “씨발, 다 나았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검게 코팅된 차 유리에 비춰보였지만 나는 점점 기분이 꼬이고 있었다. 진동도 없는 승차감이라던지, 저 어떻게 열어야할지 난감한 차 문이라던지, 하물며 의자에 깔려진 푹신한 시트마저도 보기 싫었다. 고집스럽게 바깥만을 주시하는 행동으로 기분을 대변해 보이면서 나는 스스로가 유치하다는 것을 알았다. 녀석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부분이다. 내가 10년이라는 시간동안 한사코 5분도 안되는 녀석들의 집에 가지 않았던 것도, 단호하게 도보로 통학하길 주장해 녀석들마저도 감히 걸어 다니게 만든 것도, 유치한 자격지심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부러움이라거나 질투라거나 열등감이라거나 하는 류의 것은 기필코 아니었다. 단지, 녀석들과의 차이에서 오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 “도착했습니다.” 묘하게 긴장된 투로 말한 기사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가방을 들고 튀어나갔다. 등교하다말고 모여서 웅성거리는 학교 놈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밤을 홀딱 샌 귀한 왕자님들이 아직 차 안에서 나오지 않은 채라는 것도 새까맣게 잊었다. 나는, 진심으로, 가능한한 빠르게 저 빌어먹을 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비류!”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교실로 달렸다. 이마에 닿는 공기가 시릴만큼 차가웠다. 막상 교실에 도착해서는 이틀간의 결석이 망상을 한껏 부풀려놓았는지 한층 강해진 두려움 섞인 시선들에 짜증이 나버렸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수군수군 대는 모습들은 평소보다도 거슬렸다. 하지만 가방을 창가 자리에 던져두고 교실을 나오자마자 맞닥드린 놈은 적어도 근거 없는 추정으로 벌벌 떨던 놈들보다 수십배는 더 짜증났다. “아프다는 말, 들었어.” 누구한테서, 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야, 당연히 화인이 놈일 게 뻔하지 않은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사기연.” “...........하지만 나는, 걱정했거든.” “굉장히.”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놈은 안타까워 보였다. 분명히 놈은 내가 안았던 다른 년놈들보다는 특별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질투-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로 날려대는 나쁜 손버릇정도는 웃고 넘어갔을 정도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나는 확실히 놈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손버릇만 나쁜 줄 알았더니 니 아래는 더 저질인데.” “..........뭐?” 창백해지는 녀석의 작은 얼굴은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희게 빛났다. 싫어도 눈에 들어오는 색이 옅은 갈색 머리라든지 텄는지 더 붉게 부푼 입술이라든지. 아니, 더 하얘질 수 있는 녀석의 신기한 안색이. 적어도 아름답구나, 하고 조금 감탄하게 만들었다. “질척거리지마. 서로 정조라곤 모르는 놈들끼리. 적어도 놈이 좋아서 잤다고 하면 역겹진 않아.” “............어, 어떻게......” 크게 열린 녀석의 동공을 마주보면서 슬쩍 웃어주었다. 사기연은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있었다. “아니야, 그건!!” “..........그 자식이 억지로 하기라도 했냐?” “...하지만 권화인이!!” “씨발, 입 다물어!” 이를 악물며 녀석의 멱살을 끌어 올렸다. 변명은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화인이 놈은 변명따윈 하지 않았단 말이다! 당황스럽게도 가볍게 들려지는 녀석의 몸을 내려놓으며 나는 숨을 골랐다. 조금, 흥분해 있었던가. “.........사.......랑해.” 뭐? “.......사랑해.....” “.......사랑해, 비류야.......” 젖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녀석은 찬 시멘트 복도위로 무너지면서 중얼거렸다. 조금도 멈추지 않고 ‘사랑해’라고. 보는 사람도 서러울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간절하게. “...흑....너무 많이 사랑해...............정말 사랑해, 비류야....끄윽....” “.......하아, 사기연.......” “흑흑........사랑해....사랑해......” “...기연아.......” -흠칫 처음으로 성을 빼고 부른 이름에 놀랐는지 녀석이 그제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런 녀석의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 말 들어봐. 나 너 좋아해.” “.....저, 정말?” “응. 꽤 좋아한 거 같다.........그런데...” 부정적인 말을 직감했는지 녀석이 귀를 막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녀석의 귀를 막은 손을 떼어내면서 나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아니야. 알지?” “....끄윽.....내가........사....랑.....흑...” “그래, 너는 날 사랑해도 나는 아니야. 물론 그것도 괜찮지, 예전처럼. 하지만 이제는 안돼.” “.........내...가.........더러...워..서......?” “너보단 내가 훨씬 더럽게 논다. 니가 함부로 뒹굴던 놈이라도, 그건 문제가 안돼.” “......흑흑.............” “그런데 니가 하필이면 내 친구 놈하고 자서, 그래서 그래. 다른 놈이면 그놈 두들겨 패 놔서라도 뺏어오고 싶은데 친구 놈이라 그럴 수도 없잖냐.” “..........하......지만......” “나는 이제 너 안볼거야.......니가 마음정리하고 화인이 놈 깔로서라면 뭐, 볼 수도 있겠지만.” “.....흑흑.....흐엉........비류야.........” 이제는 아주 목놓아 우는 녀석에게서 몸을 일으키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씨발, 권화인 새끼야. 뒷마무리는 니가 해야 할 거 아냐. 착잡한 마음에 담배생각이 간절해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담배가 쑥 내밀어진다. 무심코 입에 물면서 고개를 돌리니 계원이 놈이다. “왠일이냐, 니 반 아래층 아니냐?” “아아, 시끄럽길래.” 젠장. 그러고 보니 주변에 산을 쌓고 있는 인간들. 복도라는 걸 잊은 내가 미친놈이지. “야, 화인이 새끼더러 저놈 데려가라 그래.” “......저거 죽는 꼴 보고 싶냐.” “뭐?” “아아, 어차피 무사하진 못하겠지만.” “무슨 소리야?” 내말에 답은 안하고 담배에 불 붙여주는 데만 열중하는 놈에게 맥이 빠졌다. 천하의 소계원한테 뭘 바라겠냐. “끝나고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싫어, 자식아!” “그 말 하려고 왔다. 수업 잘 들어라.” 가슴이 덜컥, 할만큼 감정 없는 시선으로 주저앉아있는 사기연을 스치더니 이내 걸음을 돌려 계단으로 향한다. 몸은 누구보다 좋은 녀석이라 어째 교복차림인데도 저리 뽀대가 나는 건지 비슷한 키의 소유자로서 억울함에 이마를 접다가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서 정신을 차렸다. 산처럼 쌓인 인간들의 시선은 두려움을 넘어 정의를 옹호하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정말 악한이 되고 만 것이다. 숨도 못쉬고 서럽게 울어대는 사기연을 그대로 두고 교실로 들어갈 즈음에는 한층 살기가 강해지는 것이..... 짜식들아, 수업은 들어야할 거 아니냐고. Call the turn 12 그새 전교에 소문이 돌았는지 쉬는 시간이면 온갖 흉흉한 눈빛으로 앞문 혹은 뒷문으로 -심지어 복도 창문에까지 따닥따닥 붙어서- 모여드는 인간들 탓에 나는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녀석을 안을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사기연이 학교 내의 퀸이긴 한 모양. (다른 때라면 남학교에서 퀸이라니, 하고 비웃었겠지만 살기를 담은 인간들을 보자니 인정할 수밖에-.) 하지만 정작 나는 놀랍도록 담담했다. 사기연을 좋아했던 건 정말 사실이었다.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물론 안는 건 쉽지만- 녀석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물론 좋아했다는 것은 충두 놈이 멱살을 잡아 올렸을 때에야 깨달았지만.) 친한 친구 몇 놈에게 끌려가던 사기연놈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또한 아니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서 거의 질질 끌려가던 놈은, 끝까지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큰 소리로 엉엉 울어재끼면서도 시선을 돌리면 죽을 듯이 쳐다보는 데에는, 평소 도도한 사기연이 통곡하는 데 대한 학교 놈들의 적의 어린 시선들과는 상관없이, 되도 않는 죄책감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뿐, 나는 그새 익숙해진 한숨을 한번 쉬었을 뿐이다. 쉬는 시간마다 몰려드는 시선에 소란스럽기는 했다지만 수업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교실에 붙어있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기억하던 대로 수업은 지루했고 알 수 없었다. 학년을 마무리하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고3을 앞두고 있는 시점인지라 수업은 묘하게 열기를 뿜었다. 나는 결국 오지도 않는 잠을 바라면서 책상에 널부러졌다.. 어느새 잠이 들긴 했었던지 기괴하게 가라앉은 교실 분위기에 눈을 떴다. 조용함을 넘어 긴장까지 느껴지는 분위기를 모를 만큼 둔한 편은 아니었다. 책상 앞에서 어느새 거만한 포즈를 잡고 있는 세놈을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교실 놈들의 반응을 이해하겠는 것이, 적어도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이놈들이 교실로 찾아 온 적은 없었던 것이다. “니놈들은 잠도 없냐. 어제 밤샌 거 구라아냐?”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씨발놈아. 죽쒀왔다. 먹고 약 먹어.” “충두야, 날 죽일 셈이냐? 어제도 하루 종일 죽만 먹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나마도 다 토해놓은 놈이. 밥 먹고 뒤질라고 용을 쓰네.” 충두 놈이 보온병을 책상위로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신경질을 내자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친구라고 챙겨주는 것이 가상하지 않은가. 비록 감기보다도 놈의 욕설에 머리가 다 아프지만. “먹을테니 두고 가라. 괜히 분위기 살벌하게 만들지 말고. 인상도 험악한 녀석들이 뭣하러 셋씩이나 줄줄줄 와.” “니놈 면상을 보고 그런 말을 해. 누가 험악하다는 거야!!!” 젠장. 머리가 울린다. 알았다, 충두야. 발끈하기는. 슥. 충두 놈의 고함에 머리를 짚자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어 왔다. 예의 입술을 휘면서 허리를 숙여오는 권화인 놈. 이틀 밤을 샌 놈 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 거 아니냐. “조금 열이 있는데.....”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듣기 좋은 놈의 음성이 새삼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조심스럽게 쓸어오는 시원한 손의 감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열이 가시지 않은 이마를 매만지는 놈의 긴 손가락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으며 기묘한 감각을 일깨웠다. 맙소사! 정말 미친 거 아니냐, 한비류!!!! 놈의 사내답지 않은 흰 손이 이마를 떠나자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혹시 욕구불만인 것은 아닌가하고 열이 내리면 당장 아무 년이나 잡고 풀어버리리라하고 다짐하면서 김이 나는 보온병을 열었다. 확 풍겨오는 죽 냄새에 속이 역했지만 잠자코 수저를 집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끝나고 기다려. 계원이도 말했겠지만.” 느긋하게 허리를 펴면서 말하는 화인이 놈을 올려다봤다. 지독한 놈. 화인이 놈과 충두 놈 사이에서 계원이 놈의 무표정이 오늘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튀면 화인이 놈한테 죽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도 오지게 느끼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열어둔 창으로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았다. 풀린 눈으로 돌아본 창밖은, 때늦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인이 놈들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순간에 내리는 눈은, 뭐랄까 스스로가 참 한심해 보이게했다. 빌어먹을, 어제부터 느끼고 있던 거로군. 순간적으로 열이 치밀어올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 종례를 하기 전이니 놈들이 오려면 좀더 있어야 할 터. 애초에 기다리란다고 잠자코 기다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가방을 한손에 구겨쥐고 뒷문을 열었다. 숨죽인 채 보고 있는 교실 놈들이 내 도주(?)사실을 증언해 줄테지. 어쨌든 나는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눈발은 굵지 않았다. 머리에 축축하게 녹아드는 물방울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대면서 조급하게 발을 옮겼다. 교복차림이라 갈 만한 곳은 적다. 하지만 어쨌든 불쾌한 열기는 털어야 했다. 조금 수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기꺼이 안으리라고 나는 콧등을 찡그렸다. 교복채로 헐레벌떡 상대를 찾는 꼴이라니. 입가가 자연스레 비틀어졌다. 이런, 이런 웃음은 좋아하지 않는데 말야. 누군가와 너무 유사해서. 어쨌든 아직 몸도 안좋은 주제에 미쳤군, 하고 자조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설픈 자위가 필요할 정도로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이 좋지 않은가. 카르멘의 화려한 간판이 보이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문을 향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너무 이른 시간이기는 했다. 클럽 안은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다.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담배냄새, 술 냄새, 독한 향수 냄새. 머리를 울릴 듯이 꽝꽝대는 음악소리에 멈칫한 것은 평소보다 좋지 못한 몸 때문이었다. 클럽 안 구석에서 누군가와 몸을 비비적대고 있던 몇몇이 아는 척 해오는 것에 손을 들어주면서 바에 가 앉았다. 맙소사, 멍청한 풋내기가 된 기분이야. “비류? 와, 오랜만이네~ 근데 그 교복은 뭐야?” 킥킥대는 바텐더를 향해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느끼고 있으니까 그만해. 좀 급했거든.” “천하의 한비류가 급했다고? 농담마. 너라면 학교에서도 아무나 붙잡고 한판 할 수도 있잖아?” “..........우리 학교가 남학교란 거 알아?” “뭐, 너 바이잖아.” 빌어먹을. 개나 소나 다 아는군. “근데, 뭐 줄까?” “생각 없어. 급한 건 다른 종류거든.” “풋, 정말 재밌어 지는데? 대체 누구한테 잔뜩 흥분해서 이러는 거야?” 바텐더가 얼굴 가득 호기심을 드러내며 웃었다. 남자치곤 예쁘장한 얼굴은 나이에 비해 확실히 어려보인다. 그러니까 27이랬던가? “그럼 나는 어때?” “형이 깔릴 거야?” “뭐, 너 정도라면.” 바텐더가 눈을 찡긋했다. 확실히 예쁘지만 안기엔 좀 크잖아? 나보다 2~3cm밖에 차이가 없다는 건 부담된다고. “아깝지만 됐어. 여자가 낫겠어.” “왜? 나 정도면 죽인다구.” “형의 수많은 추종자들한테 맞기 싫어서.” “그 반대 아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바텐더에게 장난스럽게 웃어주고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시선을 보내고 있던 몇 명이 바텐더와 대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슬쩍 웃으면서 누가 더 빨리 도착할까를 보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왼쪽의 끝 테이블에서 꽤 몸이 잘 빠진 여자가 한명, 가운데 테이블에서 중성적인 여자가 한명, 오른쪽에서 키가 작은 남자와 아직 어려보이는 여자. 빌어먹을, 이곳은 게이바도 아닌데 말야. 바텐더도 그렇고 남자가 다가올 정도면 대체 내 소문이 어떻게 난거야? “고약한 녀석. 모르는 척 하면서 즐기고 있다니.” “걱정마. 오늘은 먼저 도착하는 년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질 테니까. 룸 내줄 거지?” “쳇, 금방 딱지 놓은 주제에 너무 잔인한거 아냐?” “어차피 내줄 거면서 딱딱하게 굴지마.” 입을 내밀어 보이는 바텐더에게 턱을 괸 채로 웃었다. 꽤 재밌는 사람이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흠, 고등학생?” 빙고. 가운데 테이블의 여자로군. 몸매는 그럭저럭 합격순. 나야 가슴크기 생각했으면 애초에 남자 따위 안지도 않았다. “그러는 그쪽은 대학생?” “쿡, 대학원생이야.”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옆 의자에 앉아 몸을 밀착시켜 왔다. “어려 보이는데?” “쿡쿡, 넌 들어보여.” 여자가 웃으면서 말캉한 입술을 부딪쳐왔다. 흐음, 나쁘지 않은데? 술병을 의미없이 거칠게 내려놓으며 앞의 바텐더가 눈치를 주었지만, 이렇게 몸을 던져오는 여자를 밀어내는 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여자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키스에 몰입해갔다. 얇은 원피스 안쪽의 몸이 쓸어내리는 손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작은 편인듯하던 여자의 가슴이 흥분으로 딱딱해졌다. “흐응, 너 핸드폰 울리는데?” “무시해.” 여자가 웅얼거리는 말에 짧게 답하면서 더 깊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 크게 울리는 클럽 안의 음악소리에도 핸드폰 소리는 좀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여자의 몸을 애무하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옆 의자로 던져버렸다. 홱. 여자의 검은 원피스의 어깨끈을 막 풀려는 순간, 키스하던 입술과 함께 여자가 떨어져나갔다. 어리둥절해져서 살펴보니 누군가 여자의 팔을 거칠게 잡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아래에서도 상당히 낯익은 모습이었다. “권화인?!!” “그래, 나야.” 녀석이 거칠게 웃더니 잡고있던 여자의 팔을 끌어당겨서 키스했다. 여자는 황당하게도 당황한 듯하다가 흐물흐물 녀석의 팔에 녹아내렸다. 화인이 놈은 키스하면서도 경고하는 시선을 내내 내게서 떼지 않았다. 갑자기 키스 상대를 잃은 나로서는 바텐더를 포함한 상당수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것도 잊고 멍해졌다. “씨발, 뭐하는 거야.” 여자의 입술을 거칠게 떼어내면서 -그것은 정말 우스웠다. 여자는 갑작스런 키스에 빠진 듯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화인이 놈이 웃었다. 나는 그 비틀린 미소를 보자 더 화가 났다. “뭐하는 거냐고!!” “.........모르겠냐?” 여자를 클럽 바닥에 던져버리면서 화인이 놈이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놈의 검은 눈이 깊어졌다. 머리까지 치솟던 분노가 일시에 사라졌다. 위험경보가 깜박였다. 녀석의 비틀린 미소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었지만 미소를 지운 녀석은, 위험했다. “정말 모르겠냐?” 집요하게 맞춰오는 검은 눈이 싸늘했다. 내던져지면서 비명을 지르던 여자도 항의하려다 놈을 보고 멈칫했다. 현명한 여자였다. “씨발, 권화인.” “닥.쳐.” 그제서야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던져버렸던 핸드폰을 후회했다. 이성을 잃어버린 놈을 상대로 혼자서 몇 분을 버틸 수 있을까. 씨발씨발씨발.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결코 빌어먹을 감기 때문이 아닌, 본능적인 한기. 미소를 지은 것이 첫 번째 경고라면 감정이 드러나는 말투는 두 번째 경고였다. 놈의 재미있어하는 말투에서 분노가 느껴진 걸 듣는 것은, 3년만이다. 물론 그 분노가 향하던 3년 전의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 “권화인, 진정해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성을 잃은 녀석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계원이 놈과 충두 놈도 손 못대는 놈을 내가 어떻게 혼자 막아내겠는가. 하지만 싸움터에서 뒹굴던 혈제(血帝)로서의 육감은 녀석의 주먹이 뻗어올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뻣뻣이 서는 느낌이었다. 입안이 말랐다. 다음, 아니 다음인가. 퍽. 날라온 것은 주먹이 아닌 발이었다. 재빨리 들어 막은 왼팔이 찌릿했다. 하지만 놈은 시작도 안했다. 아직, 오른 발 외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재밌군. 잘했어.” 잘 막았다는 칭찬이냐, 빌어먹을 새끼.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난리냐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주먹을 풀었다. 확실히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감이 떨어졌다. 10분, 아니 5분은 버틸 수 있을까? 어느새 클럽 안의 음악이 멈췄다. 이른 시간이라 별로 없던 손님들도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하긴, 다행스런 일이였다. 어리석게도 숫자만 믿고 화인이 놈에게 맞서지 않은 것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온 건 미안하다.” “......미안하시다?” 놈의 주먹이 뻗어왔다. 빠르다. 씨발. 상체를 숙여 주먹을 피하면서 발을 차 올렸다. 하지만 되려 중심을 잡고있던 발을 놈이 걷어차는 바람에 몸이 비틀거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발이 턱을 차 올렸다. “꺄아악!!”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허둥거리는 주변이 몇분 후엔 모두 빠져나갔는지 조용해졌다. 턱을 맞고 뒤로 넘어갔던 몸을 일으키면서 침을 뱉었다. 고여있던 피가 붉게 바닥을 물들였다. 빌어먹을, 넌 친구도 뭣도 아니다, 씨발 새끼. 니가 갈비뼈 작살냈을 때 우정이고 뭐고 그만 뒀어야 했는데. “비, 비류야....” “형, 경찰엔 연락하지마.” 바텐더가 내 입가에 피가 흐르자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경찰엔 신고할 수 없을 거다. 이 클럽은 신고하기엔 뒤가 구리다. 말하자면 나 같은 미성년의 출입이란 것을 포함해서. “잘 노는군.” 허둥대는 바텐더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화인이 놈이 내가 일어서자 다시 주먹을 뻗어왔다. 곤란한데. 아직 성공한 공격이 하나도 없으니. 놈의 주먹을 막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피해도 얼얼한 통증이 왔다. 씹, 빗맞아도 이정도라니. 얼얼해 오는 팔을 비비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제, 어떻게 한다? “맞을 때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자.” 입을 벌릴 때마다 비릿한 피맛이 났다. 얼굴이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뻗던 화인이 놈의 주먹이 코앞에서 멈췄다. 주먹에서 바람소리까지 나다니, 이놈 진짜 날 죽이려는 거 아냐? 퍽. 멈췄던 주먹이 주춤한다 싶더니 얼굴 정면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다시 나동그라지면서 입안으로 코피가 줄줄 새어 들어왔다. 코뼈가 부러진 것 같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일어서질 못하는 내 앞까지 와서 놈이 낮게 웃었다. 그대로 밟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쓰러져있는 내 멱살을 잡아챘다. “한비류, 한비류, 한비류!!!” 녀석의 검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평소 놈의 눈을 가리던 긴 앞머리가 얼굴에 닿았다. 나는 고통스런 신음을 삼키면서 놈의 눈을 마주봤다. 긴 속눈썹으로 감싸인 검은 동공에 위험한 빛이 반짝였다. “큭큭큭크크” 녀석이 특유의 입꼬리를 비트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넋을 놓고 아름답다라고 했을 그 웃음에 오싹, 몸이 떨렸다. “모르겠으면, 봐둬.” 털썩. 소리나게 멱살을 놓고는 피하지 못하고 있던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바텐더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인이 놈은 가차없이 바텐더에게 발을 들어 걷어찼다. 테이블과 함께 구르는 바텐더를 보면서 화인이 놈이 새삼 나를 봐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퍽퍽퍽퍽퍽퍽. 화인이 놈은 가차없이 쓰러진 바텐더를 밟았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저 무자비한 발길질일 뿐이었다. 피가 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를 뿜어내는 바텐더는 이미 정신이 없었다. 화인이 놈은 그러나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발을 놀렸다. 이미 피가 화인이 놈의 바짓단을 적시고 있었다. “이놈하고도 뒹굴었나?” “뭐?” “아, 네 타입은 작고 조그만 스타일이던가? 큭” 발길질을 멈춘 화인이 놈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머리가 비는 느낌이었다. “설마......” “!!” “설마.........너.............” “의외로 눈치가 빠른데.” 굴러다니는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더니 여유로운 동작으로 담배를 입에 무는 화인이 놈. 나머지 담배곽을 던져버리는 놈의 길다란 손가락은, 여전히 아름답다. 빌어먹을. “사기연........살아는 있냐.” “아아, 글쎄.” “.....................” “왜냐고 하면, 죽인다.” 놈은 언제나 변덕스러웠다. 빙글빙글 입끝으로 돌리던 담배가 곧 바닥을 굴렀다. “...........좆같은 새끼, 언제부터야.” “10년 전.” “변태새끼.” 히죽, 웃어버리는 화인이 놈에게서 눈을 돌리며 부러진 코를 움켜쥐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Call the turn 13 왜 나와 친구가 되어줬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화인이 놈은 비웃듯이 슬쩍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드물게도, 녀석의 귓가가 붉어졌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는 서늘한 안광을 뿜으면서 이를 갈았지. “누가 친구냐”고. 빌어먹을 새끼. 물먹은 솜 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린 것이, 나로서는 마땅히 장해할만한 일이었지만 나는 곧장 어렵사리 뜬 눈을 감아버렸다. 맙소사, 화인이 놈이 날 봐줬단 건 몽땅 구라고 실은 날 이미 죽여 놓은 거 아냐? “한비류, 정신 들었으면 약 먹게 일어나.” “여......기가 어디냐.” “쪽팔리게 기절했던 티내는 삼류대사 해댈래!” 충두야, 그따위 삼류대사 나도 하고 싶지 않다만, 내가 아직 정신이 덜 들어 그러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여기는 우리 집도, 병원도 아니지 않냐.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화인이 놈 집이지.” “...........” 당연히, 라니. 다친 놈은 병원 입원시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황당함에 눈을 꿈벅거리면서 내심 한숨을 쉬었다.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넓이에 기가 질린다. 화려하고 절제되어 있는 느낌.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제외하면 모든 게 동양적이다. 목제 장식장에 늘어서있는 중국산 도자기, 벽에 걸려있는 민속화. 침대 뒤로 병풍을 두르지 않은 게 놀랍군. “........알고 있었냐.” “너 빼곤 다 알았어, 씹새야.” “........” “이만한 게 어디냐. 난 화인이 놈이 네놈 결국 죽일 때까지 모를 줄 알았는데.” “.....저번에 한 얘기가 그 말이었군.” “오지게 둔해 터져서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모르냐.” 아아, 그러니까 다른 건 다 알겠는데........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뭐?” 눈에 띄게 얼굴이 굳는 충두놈. 갸름한 턱선이 흔들린다. “나는 권화인에게 밟힌 걸로 기억한다만.” 놈의 붉은 입술이 쫙 벌어졌다. 안 그래도 커다랗던 눈은 화등잔만 해지고, 놈의 귀에 칼 모양의 피어싱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아직도 니놈들 곁에 붙어있어야 하냐.” “한비류!” 욱씬거리는 상체를 들었다. 기대앉은 침대 머리판이 쓸데없는 장식으로 등을 찔렀다. “......그 바텐더는 병신됐다.” 젠장. “다시는 걷지 못할거라더군. 살아난 것도 다행이지.” 빌어먹을. “.............네놈이 밟힌거라고?” 충두놈이 기막힌 듯 웃었다. 나는 놈을 보며 숨을 멈췄다. 놈이 하려는 말을, 알고 있었다. “사기연은 거기가 날아갔지.” 맙소사. “현대판 내시인건가. 킥킥” 어깨까지 떨어대며 웃는 충두 놈을 보자 척추를 따라 소름이 내달렸다. 한참을 웃던 충두 놈의 얼굴이 조급하게 일그러졌다. “어때, 네놈이 밟힌거냐?” “..........네가 그 마음 알아챈 것만으로도 기뻐하던 놈이다.” “잔인하게 굴지 마, 한비류.” 놈의 시선이 차갑고도 단호하다. 위가 뒤틀리듯 아파왔다. “한 가지만 묻자. 애초에 친구가 아니었던 거냐.” “..........아마.” 아아, 그래? 그렇담 의미 없는 불편한 배려따윈 기대도 말라고. “씹, 뭐하는 거야!!” 몸을 움직이자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는 걸 무시하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갈비뼈가 몇 대 나간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지. 넓기만 한 방을 가로질러 방문 손잡이를 잡자 어리둥절하게 보던 충두놈이 뒤에서 소리를 빽 지른다. “한비류!!” “.........어쨌든 꽤나 고마웠다.” “너...” “마지막으로 멋있게 해줄 말이 이 머리론 떠오르지 않아서.” 슬쩍 뒤를 돌아보며 한손으로 머리를 짚어보였다. 씨익 웃어주는데 몸의 둔통에 제대로 지어졌을지는 의문이다. 그것 조금 움직였다고 벌써 머리가 어지러워서 서둘러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니까, 네놈의 원망스럽단 표정은 못본거다, 정충두. 달칵. “?!!” “꼭 그래야 되냐.”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복잡한 표정의 소계원. 핫, 네놈이 그런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일 줄 알다니. 마지막이라 그런가, 너무 새롭잖아. “네가 이제야 자기 마음 알게 됐다고 좋아하는 놈에게 조금쯤 시간을 더 줄 수도 있지 않냐.” 역시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녀석은 이놈일지도. 애초에 내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충두 놈에게서 보이던 경악한 표정은 없다. 단지 질책하는 표정만이 같을까. “뭐가 더 잔인한거냐, 소계원.” “..............” “내 성격이 불같았음, 늬들 모두 내손에 죽었다.” “.............” “씹스러운 표정 짓지마, 개자식아. 난 어차피 그놈 못 받아들여. 그 미친 놈, 더 돌게 만들어주길 바라냐?” “10년이다. 그놈이 나도 뻔히 보이는 네 반응, 예상 못할거라 생각하냐.” 내가 알기로, 계원이 놈이 저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씨발. 애초에 화인이 놈이 친구가 아니였으면 니놈들도 그런거다. 그런 논리따위, 엿먹으라 그래! “그래도 그놈, 그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봤다. 머리 좋은 놈이라 안되는 일에 희망 따위 거는 놈이 아닌데 밤새 잠도 못자더라. 집착 따위 키우는 놈이 아닌데 죽을 정도로 너만 보더라.” 계원이 놈의 눈이 말한다. 너는 그 허무한 웃음 속 표정을 모르느냐고. 대답은, No. 나는 늘 여유롭게 위험한 녀석만을 알아. 놈의 보이지 않는 아픔은 내 몫이 아니다. “너 맞고 돌아다니는 거 알고 너에게 싸움 가르친 것도 그놈이고, 곤란할 정도로 안하무인인 놈이 네놈 혼자 있다고 저녁이면 찾아간 것도 그놈이다. 네놈 처음 여자 안았을 때, 그놈 며칠 술로 살았고!” “충두는 네놈 좋아해서 잘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솔직히 친구놈 남자한테 마음 주는 거 싫다. 너는 나름대로 좋은 놈이지만, 한번도 화인이 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그놈, 너 사라지면 정말 위험해진다. 가려거든 녀석을 죽이고 가라. 그게 덜 잔인하다.” 갑작스런 진실은, 굉장한 무게로 압박해온다. 머리를, 가슴을, 심장을. “중 2때, 너 잠깐 일주일쯤 사라졌을 때 -물론 너는 시골에 다녀온 거였지만- 녀석이 폭주했었다. 놈이 바이크 타는 걸 말리다가 나도 충두도 가슴이랑 어깨에 칼 맞았었지. 요령 좋지 않았으면 죽었을거야. 큭큭.” 그러니까 두렵다는 거냐. 푸핫, 천하의 소계원이 그럴 리가 없지. 더하면 더할 놈이. 단순히 놈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거다. 그래, 이거야. 내가 알던 것. “대체 어떻게 하란 소리냐.” “.......녀석 옆에 있어줘.” 부탁. 맙소사. 감격해야하냐. 소계원한테 부탁을 다 들어보고. “네가 원하지 않으면 건들 놈 아니다. 아까워서 때리지도 못하는 놈이야. 질투로 돌아버린 중에도. 그냥 눈에만 보여주면 된다.” “소계원, 무슨 소리야!! 비류야, 그 말 듣지마! 너 화인이 맘 받아줘. 그래야 돼!!” 잠자코 있던 충두가 뒤에서 소리쳤다. 머리가 울렸다. 기묘한 공방전. 이 사태의 당사자가 나라는 사실이 소름이 끼칠만큼 끔찍하다. “소계원, 억지 부리는 게 누구지.” “.............” “그놈 결국 때때로 돌테고 나는 폭주하는 그놈 막아야 돼. 지저분하게 놀아대는 놈이 난데, 그 뭣같은 화인이 놈 성질이 개지랄 떨 건 뻔하고 몇 번을 어제 같은 일을 겪겠지.” “어젠 놈이 널 걱정하다가...” “더구나 놈이 그 상태에서 행복할 거라 생각하냐. 오히려 내가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주는 게 놈을 위한 일이란 생각 안드냐.” 계원이 놈의 검은 눈이 흔들린다. 아주 잠시지만, 그 검은 눈에서 명백한 망설임을 읽고는 쓰게 웃었다. 내가 아는 다른 검은 눈은 다르다. 네 녀석보다 아주 깊고 검어서, 전혀 흔들리지도 않고 직시해오는 눈동자를 안다.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눈인 주제에, 언제나 무언가를 감추듯 비틀린 미소만 지어내는, 성질 드러운 위험한 녀석을 안다. “그건 그녀석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한비류.” 낮은 목소리. 녀석 특유의 듣기 좋은 저음이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울렸다. 결국, 배우는 다 모인 셈이다. 난데없는 목소리에 당황한 계원이놈의 표정을 보면서 쓴웃음이 났다. 너, 오늘은 절대 포커페이스라 불릴 수 없겠는데. 너무 망가지지 말라고. Call the turn 14 화인이 놈의 얼굴엔 예의 알 수 없는 웃음이 걸려있다. 청바지에 흰티를 걸친 놈의 모습은 지나치게 나른해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녀석의 어디에서도 고통이나 흥분 따윈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여유 있어 보이는 태도에서 녀석다움만을 깨달았을 뿐. 평소보다도 창백한 얼굴빛이 피곤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헐렁한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끼워 넣은 채로 놈은 그저 웃었다. 녀석을 돌아보는 계원이 놈의 눈에 어두운 뭔가가 어렸다. 그러나 착각이라 할 만큼 재빨리 사라진 그것에 조소하면서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지저분한 삼각관계 따위, 정말 질색이다. “멀쩡하군. 화나 있기를 바랬는데.” 놈의 낮은 목소리는 늘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다. 빌어먹을. 화인이 놈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면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것에 나는 안도했다. 희미하게 계원이 놈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두놈 중 누구 때문에라도 화를 냈다면 질투로 확실히 죽여 버렸을지도. 크큭.” 입만 비틀어 웃어 보이면서 놈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면서 얇은 티 아래로 드러난 놈의 몸에 계원이 놈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서서히 반응하는 놈의 분신에 혀를 차면서 애써 화인이 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남자다운 놈에 반응하다니, 너도 녀석 못지않은 변태구나, 소계원. 하지만 어서 수습하라고. 저놈에게 눈치 채이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고. “...........갈 거냐.” “절대로.” “한 걸음씩 도망갈 때마다 너를 범하고......” “.............” “내게서 떠나려는 네 두 다리를 꺾고........” “............” “나를 보지 않는 네 눈을 뽑아버려도.........” “...........” “..........역시 갈거냐.” “날 죽인다음에 박아봐, 씹새끼야.” 녀석이 웃는다. 피식, 하고 입만 웃는 주제에 그래도 웃음이라고 웃는 게 화가 나서, “나는 네 사람 아니다, 권화인.” “그래도 여전히 네 친구다.” 놈이 쓰게 웃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함께 손을 빼내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누가 친구냐.” 그래도, 내게 너는 친구다. 10년간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고, 평생에 제일 고마울 녀석이고, 언제나 내가 미안해할 놈이고, .........나 따위와는 다른 위치에 있는 잘난 새끼고. “..........어쨌든 간다는 거지.” “친구니까 가는 거다.” 녀석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 거렸다. 담배 끝을 향하고 있는 녀석의 눈은, 알 수 없다. “진심으로 놔줘야겠단 생각이 드는데.” 담배 연기가 놈의 얼굴을 가린다. 어쩌면 웃는 것도 같다. “유감스럽게도 요 며칠 몸이 말을 안들어서.” 놈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겨온다. 그 느긋한 몸짓이,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워서. “어쩌냐, 한비류. 몸은 널 죽여야겠다는데.” 담배가 걸린 비틀린 입가가 눈부시게 붉어서. “입 다물어.” 녀석의 다가오는 주먹마저도 당황스럽게 하얗다. 퍽. 쿠당탕. 구석에 처박힌 몸이 뻐근한 통증을 호소한다. 후두둑, 하고 꽤 많은 피가 얼굴에서 떨어진다. 코와 입에서. 입안을 가득 차오는 비릿함이 역겹다. 이런, 한대에 이런 꼴은 아무리 네놈 주먹이라도 심하잖아. “권화인!! 이 씨발 개새끼야, 충기 형이 이 새끼 치료하고 간지가 어젠데, 왜 또 난리야!!” 서둘러 뛰어오는 충두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몸이 온갖 수난을 다 겪는군. 감기에, 매질에. “비켜, 정충두.” “!!” 담배 연기를 뿜어대면서 녀석이 낮게 말했다. 창백해진 충두 놈의 얼굴과는 반대로, 놈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고서는 움직이지 않는 충두 놈을 흘낏, 보더니 놈이 씩 웃는다. “뭐, 좋겠군.” 퍽. “우욱!!” 벌어진 입에서 피가 섞인 타액이 흘렀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에 닿았는지 숨쉬기가 고통스럽다. 바람빠진 소리가 나는 숨을 집어삼키며 고통으로 몸을 웅크렸다. 화인이 놈의 발길질에 함께 쓰러져버린 충두 놈이 옆에서 움직이는 게 들렸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이놈 진짜 죽일 셈이야!!!” 퍽.퍽.퍽.퍽. “으윽....큭” 등으로 머리로 다리로 가차 없는 무게가 실린다. 머리에서 피가 터지고 충두놈의 고함소리도 웅웅거린다. 고막이 나갔는지 왼쪽 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소계원, 화인이 놈 좀 말려봐!! 비류 죽겠어!!!” 퍽퍽퍽퍽퍽. “윽...” 뚜둑. “으헉!!!!” 머리를 감싸던 오른쪽 팔 부러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렸다. 입에선 끊임없이 듣기 싫은 신음소리가 흘렀다. 탈골된 어깨가 끔찍하게 아파왔다. 이미 얼얼하게 부어오른 얼굴은 느낌에도 심각했다. “으....쿨럭쿨럭” 기침이 피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타는 듯한 뜨거운 아픔이 가슴을 짓눌러서 한층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느새 발길질은 멈춰있었지만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보기 흉하게 부었을 얼굴을 따라 식은땀과 눈물이 흘렀다. 맙소사, 나는 두려웠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비류야...” 녀석의 낮은 목소리는 웅웅거리는 귓가에도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목덜미로 놈의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권화인!! 어서 병원에 데려가야..” “닥. 쳐.” 주체할 수 없게 온몸이 떨려왔다. 놈의 서늘한 손가락이 머리를 쓰다듬자 두려움으로 숨도 쉴 수 없었다. 얼굴로 더운 숨결이 뿜어졌다. “처음 봤을 때도 이렇게 울고 있었지.” 놈의 손가락이 부운 얼굴 위를 쓸었다. 눈물은 흉하게도 멈춰지지 않았다. “아직도 예쁘다, 한비류.” 차갑고 축축한 것이 눈꺼풀에 닿았다. 그것이 입술이란 것을 깨닫고 나는 화들짝 놀라 부워서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올렸다. “꺼져.........씹....새” “매일 밤 이렇게 너에게 입 맞추고....” 녀석의 입술이 이마에서 코로, 입술로 차례차례 내려왔다. 의식이라도 행하는 듯한 행동으로 놈의 입술이 닿았다 금방 떨어지자 굉장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은, 성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매일 밤 이렇게 너를 애무하고........” “.....무슨!!” 놈의 서늘한 손이 교복 와이셔츠 단추에 닿자 나는 경악했다. 뜯어져 나간 단추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뻗뻗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비틀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어느새 몸 위로 올라탄 놈의 입술은 가슴에서 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러진 팔과 탈골된 어깨가 바닥에 닿자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졌다. “매일 밤 너에게 들어가서...” “비..켜........미친......자...식..” 놈의 분신이 흥분한 게 아랫배에 느껴지자 나는 다급해졌다. “그래, 미친 듯이 너를 갖고....” “읍!!” 녀석의 입술이 다시 입술을 덮었다. 벌어진 입으로 녀석의 혀가 거칠게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느긋하고 부드러운 애무와는 전혀 다른, 조급하고 절박한 키스. 세게 감아오는 녀석의 혀에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입천장을 훑는 녀석의 혀를 밀어내면서 녀석의 다급함 따위는 잊어버리려 했다. 상처가 터진 입안에 비릿한 맛이 돌았다. 녀석의 혀는 집요하게 상처를 핥으면서 숨 가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키스는 녀석의 손과 입술과는 달리 따뜻했다. “권화인, 병원에 가야 돼. 그만해.” 충두 놈이 강하게 소리쳤다. 화인이 놈이 그 말에 입을 떼더니 아쉬운 듯 살짝 입을 맞췄다. 웃는 게 느껴지는 키스. 뭣 같은 새끼. 더럽지도 않나. 피랑 눈물로 범벅인 놈한테. 어느새 몸의 떨림은 멈췄지만 감각이 돌아오면서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끔찍스런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들어올리는 화인이 놈의 손을 느꼈다. 왠지 아픔보다도 서글퍼지는 기분이었다. Call the turn 15 녀석은 가슴 안에 모래성을 쌓았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가슴 안에 하필이면 모래성을 쌓아서, 그 작은 모래알갱이가 가슴을 할퀸다는 것을, 참고 참다가 터져 나온 신음이라는 것을, 함께한 10년을 이유로 나는 물론 알았다. 나는 끝임 없이 바다를 철썩였다. 네 가슴에 닿는 파도는, 여지없이 높기만 한 모래성을 부쉈다. 10년은 그러한 세월이기도 했다. 너는 지칠 줄 모르고 모래성을 쌓았고, 나는 지칠 줄 모르고 그것을 부쉈다. 나는 네 가슴에 모래를 사랑했다. 완성되어가는 허무한 성에,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재주 없이 쌓아가는 그 허름한 성에, 물론 나는 눈이 부셨지만, 그 까끌한 모래보다 네 가슴을 사랑한 것을, 물론 역시 잔인함일 뿐이지만. 네가 모래성에 사랑이란 이름마저 깊게 새기기 전에, 네 가슴이 다른 견고한 성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할 것을, 이기심을 이유로 너는 오래도록 탓하기를. 나는 네게서, 내가 사랑하던 모래마저 마지막 깊은 파도로 모두 가져갈 테니. .........아픔이 있다면 부디, 그리움은 아니기를. 소독약 냄새. 오른 쪽 팔에 이질감. 숨쉬기 거북스러운 통증. 병원에서 눈을 뜨며 든 생각은 학교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 며칠을 빠진건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팔에 이어진 똑똑 거리는 물방울 소리를 내는 링겔 병. 붕대로 둘둘 말린 온몸. 덩그라니 방치된, 1인용 병실. 혼자 눈을 뜨는 것은, 익숙한 일이라고 나는 웃었던가. 제길, 그래도 이따위로 패놓고 다들 어디 간거냐. 끄응, 신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왼쪽에 자리 잡은 창문은 아쉽게도 닫혀있다. “깼냐?” “씨발, 환자를 이렇게 방치하는 게 어딨어!” 충두 놈이 슬렁슬렁 들어오는데 화가 치밀어서 소리쳤다. 확 담배냄새가 나서 더 기분이 상했다. “너만 담배 태우니 좋냐. 나도 한대 줘라.” “폐 다친 놈이 뒤질라고. 너 전치 6주야, 씨발아.” 6주라. 크큭. “..........화인이 놈은?” “병원 어디에 있겠지.” “....계원이 놈도?” “뭐, 그야..”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충두 놈을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이고 속는 감정. 어쨌든 녀석의 감정을 아는 것은 나뿐인가. 크큭. 불쌍한 녀석. “부모님께는 연락 안했다.” “잘했어, 어차피 모를 거다.” “.............” 충두 놈이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린다. “어떻게 할 거냐.” “설마 나보고 사내놈한테 엉덩이나 대주고 살라는 건 아니겠지.” “미친 새끼, 그렇게 말하지 마.” “미친 게 누구냐. 친구 놈한테 꼴리는 그 새끼냐, 나냐.” “씹..” 퍽. 충두 놈이 거칠게 벽을 찬다. 암튼 저 지랄 같은 성질머린 바뀔 생각을 않는군. “너도 사내새끼 안잖아, 씹새야!” “그래서, 화인이 놈이 나한테 깔린 대냐?” “푸하하핫, 그거 재밌겠는데?” “미친놈.” 한숨이 나왔다. 복잡하고 끈적끈적한 불쾌한 느낌. “정말 깔리는 게 문제란 건 아니겠지?” “나는 그놈한테 안서.” “야!” “어렸을 땐 어쨌든 나 지금은 비리비리한 놈 아니다. 여자가 좋고, 남자라면 계집애 같은 놈이 나은 건 당연한 거 아니냐?” “그놈 면상은 충분히 계집애 같잖아.” “나보다 크잖아! 더구나 날 깔려고 하잖아!!” "푸푸.....풉....끅끅“ “미친놈. 그만 웃어라.” 한숨이 나온다. 이런 농담 따먹기라니. 문제는 나도 모른다, 충두야. 그냥 안된다는 생각만 든다. 그 잘난 놈, 어쨌든 나는 사랑이 아닌데. “늬들은 머리 좋잖냐.” “............” “뻔한 사실을 왜 못 본 척 구냐.” “........한비류...” “뭐가 그놈을 위한 일인지, 잘 생각해라.” “...고집이 쇠심줄 같은 놈들..” “푸하핫, 너만 하겠냐.” 더럽게 운 없는 놈. 너는 아직 모든 진실은 모른다. 네가 영원히 그것을 모르기를, 누구보다 너를 위해서. 화인이 놈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이틀 후였다. 눈에 띄게 얼굴빛이 창백해져서, 때린 건 지놈이면서 형편없는 안색을 하고 있는 놈에게 대뜸 베게를 집어 던졌다. 그제야 일그러진 웃음을 띄우는 놈에게,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따위 웃음이라도 없는 것 보단 낫구나. “뼈를 부러뜨려 놨으면 옆에서 시중이라도 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아아, 옆에 있다가 덮치게 될까봐.” 녀석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좋아하는 녀석의 버릇. “나 환자다. 옆에서 귤이나 까봐.” “.........오렌지가 낫겠군.” 다소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 화인이 놈이 과일 바구니로 걸어가면서 낮게 말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녀석. 그 과일바구니도 네놈이 가져다 놓은 거란 거 안다, 새끼야. 온통 신 과일로 가득한 과일 바구니가 어딨냐. 귤, 오렌지, 한라봉, 레몬........ 비타민 C 과다다. “나는 병실에 처박아두고 혼자 나돌아 다니니까 좋냐?” 잠자코 오렌지를 받아먹으면서 시비를 거니 픽 웃고 만다. 혀끝으로 넘어가는 오렌지가 쓰다. “심심하니까 비디오나 빌려와라.” “....뭐 보고 싶냐.” “아무거나. 씨발, 오렌지 그만 까. 배불러!” 잠자코 오렌지만 까던 손이 멈칫 하더니 이미 까둔 오렌지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아깝게 버리긴 왜 버려! 니가 먹어!!” 미친 자식. 니놈 보아하니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먹었구만. 가만, 빈속에 오렌지가 들어가면 속 쓰리려나.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아 오렌지를 먹기 시작하는 화인이 놈. 왜 그렇게 너답지 않게 구는 건데. 내가 욕하면 낮게 으르렁대야 하는 거 아니냐. “...너는 여전히 그렇군. 내가 죽여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 “그래서 못 죽이는 건가. 아무 미련 없이 죽어버릴 까봐.” 화인이 놈이 쓰게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빙빙 도는 감정의 찌꺼기. “너를 위해선, 죽이는 게 나았을 거다.” “알아.” 녀석이 건조하게 대답한다. 그 멋진 낮은 목소리가, 오늘따라 따갑다. “사기연이 그러더군.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아, 머리 좋은 녀석이었지.” “어리석은 녀석이었어. 너를 사랑해버렸잖아. 내가 경고했는데.” “그러는 너도 어리석어.” “물론. 최악의 바보지.” 녀석에게 낮게 웃음기가 배어나서 나는 조금 안심했다. 변덕스런 녀석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지만. 녀석의 손이 머리로 올라왔다. 머리를 매만지는 손에서 오렌지 냄새가 났다. 새콤하고 향긋한. “한비류, 맞고 다니지 마라.” “이건 니놈이 한거야, 씨발아.” 녀석이 눈을 휘었다. 평소랑 달리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고 있어서, 머리를 조심스레 헤집는 손길이 너무 녀석 답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게 잘난 놈. 질투나게 멋진 놈. 가슴 뛰게 섹시한 놈. 다가오는 녀석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천천히 들어오는 혀에서 오렌지 맛이 났다. 부드럽게 감아오는 혀가 달다. 인정하긴 싫지만, 너 대체 키스를 얼마나 하고 다녔길래, 뭐냐, 이 테크닉은! 도무지 리드할 수가 없잖아!! Call the turn 16 상체를 굽힌 채 키스를 해오는 화인이 놈의 포즈는 분명 불편했을 텐데도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의도인지 놈의 손은 허공에서 멈춘 채. 부드러운 녀석의 입술을 살짝 깨물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미친 놈. 피 보고도 웃나 보자.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멀쩡한 오른손을 녀석의 목에 감았..... 빌어먹을. 팔에 꽂힌 링겔을 잊고 있었다. 씹, 바늘구멍이 후벼졌는지 아프다. “쿡..움직이지 말라고. 간신히 참고 있다니까.” 입술을 맞댄 채 속삭이는 놈의 숨결에 입술이 간지럽다. 새끼, 키스 하나는 졸라 잘하네. “말해두지만 내가 위다.” “큭큭, 그 몸으로?” 놈이 웃으면서 다시 입을 맞춰온다. 살짝살짝 닿아오는 간지러운 키스. 감질나서 놈의 입에 혀를 집어넣었다. 갑자기 굳어버리는 화인이 놈. 이봐, 잊은 모양인데 나도 탑이라고. 녀석의 반응이 재밌어서 놈의 입안을 세게 훑자 놈이 거칠게 혀를 감아온다. 이제까지의 장난스러운 느낌이 아닌 농밀해진 키스에 당황한 것은 나. 윽, 그렇게 감아올리면 아무리 나라도 아프다고! 달칵. !!! 화인이 놈과의 키스에 거의 침대에 쓰러질 지경이었던 나는,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고는 굳어버렸다. 맙소사, 머저리 한비류!!! 소계원을 잊고 있다니!! “뭐야.”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계원이 놈에게 화인이 놈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키스를 방해받은 데 기분이 상했는지 평소보다도 신경질적인 표정. 빌어먹을, 권화인!! 너도 나만큼이나 둔하다!!! 저 자식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방해를 한 모양이군.” “알면 나가줘야지?” 니놈이 사람 맞냐. 저놈 니 둘도 없는 친구다. 저놈 감정을 모르더라도 너무한 거 아니냐.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계원이 놈이 안쓰러워서 거의 침대위로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화인이 놈은 굳은 채 움직이지 않는 계원이 놈에게 한쪽 눈썹을 험악하게 들어보였다. “왔으면 들어올 일이지 뭐하고 있냐. 충두 놈하고 같이 안왔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자 이마를 접는 화인이 놈. 계원이 놈이 문을 닫고 들어오자 피식, 하고 입가를 비틀어 버린다. “....어떻게 된 거냐.”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로 물어오는 계원이 자식.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눈동자가 흔들린다. 화인이 놈 곁에 있어달라던 주제에, 막상 그렇게 될까봐 두려운 거냐. “......사...귀기로 한 거냐” 그런 어색한 웃음은 관둬라. 네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런 식으로 하다간, 조만간 정말 놈에게 들켜버리고 말겠다. “...........덮쳐지던 중이다. 충두 놈은?” “좀 있으면 올 거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 화인이 놈이 날 밟을 때도 녀석을 말릴 수 없었던 네놈 진심. 그것이 너의 마음의 깊이냐. 내가, 너에겐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위험한 사랑을 하는 너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못마땅한 듯 이마를 접던 화인이 놈이 의자에 주저앉아 까던 오렌지를 집어 올리자 계원이 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긴, 녀석이 과일을 깎는 건 처음 보는 일일 테지. 온통 노란 과일만 가득한 과일바구니를 보면서 계원이 놈이 뭔가를 깨달은 듯 입가를 굳혔다. 충두놈이라면 임신했냐, 고 놀려대기라도 했을 텐데. 그저 조용한 병실. 다시 감도는 감정의 기류. “뭣 좀 먹고 이걸 먹는 건가.” 오렌지를 먹기 시작하는 화인이 놈에게 계원이 놈이 낮게 물었다. 한마디 대꾸도 듣지 못하면서, 미련한 자식. “화인이 이틀째 빈속이다. 이걸 먹이면 어떡하냐.” 얼굴을 찌르는 적의. 황당한 듯 녀석을 쳐다보는 화인이 놈과는 달리, 나는 조금의 대꾸도 할 수 없다. 사랑을 하면 그러냐. 친구도 안보이는 그런거냐. 너도 화인이도, 지독하도록 하나만 봐야하냐. “소계원, 죽고 싶냐.” 화인이 놈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평생을 함께해도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 녀석.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계원이 놈. “오늘도 아무것도 먹지........” “돌아버리겠군.” 싸늘하게 식어버린 화인이 놈의 검은 눈. 이죽거리는 듯한 입술. 딱딱하게 굳어진 계원이 놈의 포커페이스. 부서져 내리는 감정의 잔재. 화인이 놈이 서서히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계원이 놈은 그대로 앉은 채다. 왜 내겐 보이는 거냐, 소계원. 왜 너의 가면이 내겐 한없이 엉성하게만 느껴지는 거냐. 저 예민한 놈은 아직 모르는데, 충두 역시 모르고 너에게 상처만 되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왜 지금에서야 내게 보이는 거냐. “요 며칠 몸 푼 거로는 부족하냐. 왜 걱정하는 놈한테 시비냐.” 당치않게도 몸을 움찔 하더니 홱 하고 내게로 시선을 돌리는 화인이 놈. 곧은 눈썹은 잔뜩 일그러져있다. 쳇, 계원이 놈 걱정하다 내가 먼저 가겠군. 하지만 화인이 놈은 그저 슬쩍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쉬곤 자리에 앉아버려 계원이는 물론 나까지 경악하게 했다. “그렇게 저놈편만 들면 저놈 진짜 위험해진다, 한비류.” 녀석의 얼굴엔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답지 않은 농담에 긴장한 쪽은 오히려 듣고 있는 계원이놈과 나. 입가를 씰룩대던 계원이 놈이 이내 크게 웃어버렸다. “빠져줘야하는 분위기로군. 권화인, 환자 상대로 심하게는 하지마라.” 유쾌한 듯이 말하고는 일어서버리는 녀석에게 되려 어안이 벙벙해져서 가능하다면 돌아선 저 넓은 등을 돌려세우고 싶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사내다운 곧은 등. 일정한 보폭으로 멀어지는 차가운 발소리. 그야말로 녀석답게 단조롭고 절도있게 닫히는 문. 아마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네 차가운 구두가, 조금이라도 망설임을 담아 콘크리트를 늦게 두드렸다면,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소계원.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그 빌어먹게 잘난 자제심이, 네놈의 자존심이 그토록 대단하지만 않았다면, 혹시나 그럴 수 있었다면, 소계원. “굶긴 왜 굶었냐.” “식욕이 없더군. 그보다 더 먹고 싶은 게 있어서.” “미친놈.” 다가오는 이 입술을 나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씨, 오레지나 머거..(씹, 오렌지나 먹어)” “크큭, 발음이 새잖아.” 차가운 입술과는 달리 키스는 따뜻하단 걸, 아마도 절대 인정하지 않았겠지. 큭, 머저리 같은 새끼. ..........여우같이 머리 좋은 새끼.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냐....................... Call the turn 17 병원생활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지루해서 나는 거의 커다란 창에서 비춰드는 햇빛을 맞으며 조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답지 않게 꼬박꼬박 학교에 가는 화인이 놈이 회진을 도는 의사에게 싸늘한 경고의 미소를 날리고 학교에 가면, 나는 정말로 심심해져서 기어서라도 1인용 병실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링겔을 꽂은 채로 질질 기어서 놀아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꼴은, 스스로 비참했기보다는 화인이 놈에게 걸리면 기어가다 등을 밟힐 위험이 컸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배가 터져서 죽는다니, 비참하지 않은가.) 실제로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 꿈에 그리던 간호사라는 존재는, 화인이 놈의 입김이 작용한 것일 터. 하지만 사내놈이라면 의당 ‘백의의 천사’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마련. 그것도 병원 침실에서 환자와 간호사의 로맨스라니, 멋지지 않은가. 물론 치밀한 계획 하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나 가능할 일이라고 곧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박아버렸지만. 계원이 녀석은 그렇게 가버린 뒤, 조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충두 놈 말에 의하면, 뭔가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어쨌든 조직을 이끌어야할 후계자이니 만큼 거친 일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녀석이 일부러 위험에 뛰어들지는 않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역시 충두 놈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한다고 하니 녀석다움에 안심도 되었다. 나약한 녀석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긴 했다. 어쨌든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니, 몹쓸 녀석이라고 나는 쓰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그 멋진 근육이 상해온다면, 약간이라도 그 잘생긴 얼굴이 말라온다면, 물론 나는 녀석에게 크게 한방 날려줄 생각이었다. 부러진 팔이 잘 휘둘러지지 않는다면, 저 링겔 병을 녀석 머리에 내리치는 것도 좋겠지. 설마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거라고 마치 놈이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언제쯤 몸이 회복될까. 언제쯤 이 지루한 미로에서 출구를 찾게 될까. 화인이 놈은 대답대신 웃었다. 내가 물음대신 키스를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제는, 그랬다. 녀석이 비디오 테입을 잔뜩 빌려와서는 막상 틀지는 않고 이것저것 불만스럽다는 듯이 골라대기 시작했다. 너무나 열중해있는 게 신기해서 -녀석이 그렇게 집중한 표정을 보는 것은 요원한 일이므로- 뭔가 딱히 찾는 영화가 있는 건가하고 나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이것저것 들썩여대던 한 무더기의 비디오를 보다가 홱하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더니 다시 한숨을 쉬고 비디오만 골라대던 녀석. 나는 말할 수 없이 황당해져서 물었다. “대체 뭘 찾는 거냐. 니가 영화 좋아했던가.” “설마.” “그럼 아무거나 봐.”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녀석이 익숙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아무거나 괜찮은데.” “그게 문제인 거다. 제기랄, 빌어먹을!!” 녀석이 드디어 비디오 테입들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석으로 처박히는 테입들을 보면서 나는 얼굴을 구겼다. “왜, 울퉁불퉁한 녀석들만 나오는 건 없는 거지.” “그걸 찾는 너 같은 변태 놈들이 또 없나보지. 근데, 지금 제정신이냐.” 녀석의 취향에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면서 나는 물었다. 나야말로 건장한 사내놈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묘한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도 들었다. 화인이 놈의 취향은, 맙소사! 완벽한 변태가 아닌가! “..........영화 보면서 네놈이 침 흘리는 꼴은 절대 못 본다.” “........너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여자도, 남자도 모두 나오지 않는 것만 본다.” “...........그런 영화가 어딨냐.” 기가 막혔다. 내가 발정난 개새끼도 아니고. 아무렴 포르노도 아닌 까짓 비디오 보면서 침을 흘리겠냐! “훗, 찾았다.” “뭐, 아프리카의 밀림 같은거?” 되는대로 비웃는 내게 화인이 놈이 들어보인 것은, ...................‘몬스터 주식회사’였다. 제기랄. 달칵. “뭐하고 있냐.” “........웬만하면 노크 정도는 하지 그러냐.” “지랄하네. 계집애 흉내는, 새끼.” 노크도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충두 놈을 보면서 그저 한숨만 쉬었다. 시간으로 보건대, 이놈 틀림없이 수업 토꼈다. “정말 병신이 따로 없구나. 쯧, 거동도 못하다니, 이렇게 붕대로 둘둘 말린 새끼한테 꼴린단 말야, 그 화인이 새끼는?” “..........그놈은 다시없을 변태다, 충두야. 날 구해다오.” “.................” “.................”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얼른 나아서 녀석을 덮쳐라.” “...........진심이냐.” “끄어어억!!! 아니, 실은 상상도 하기 싫구나. 너나 그놈이나 깔리기엔 호러다.” “그러니까 도와달라고.”(제길, 그리고 왜 멋대로 상상은 하고 난리냐.) “씨발, 그냥 깔려, 씹새야!! 잘생긴 놈이 깔아준다는 데 웬 생떼야!!” ............큭, 논점이 맞질 않는군. 충두야, 모른 척 하지 마라. 그거라면 내가 이미 충분히 했다. “녀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 아냐.” “아, 씨발, 그만해!” “좋겠군, 그 자식 무너져가는 걸 보는 것도. 알다시피, 나는 그놈 사랑도 뭣도 아니야.” “.............협박이냐.” 그래, 협박이다. 이러지 않고서는, 네놈 절대 움직이지 않겠지. 전술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너희한테 배웠다. 녀석을 생각하는 네놈 마음은, 모순 되게도 녀석에겐 최악의 패다. 권화인, 이 게임을 이기는 건 나야. “화인이 놈한테, 절대로 너 그렇게 못해.” “못할 것 같아? 아주 쉬운 일이란 거 알고 있지 않냐. 웬만큼 잘난 집 년이랑 붙어먹기만 해도, 그놈 사고 치고도 남아.” “..........한비류!” “그놈 배경 싸그리 뭉개줄만한 집 자식, 대한민국 내에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나.” “나와 계원이가 있어! 계산 오류야, 씹새꺄!” “잘난 우정이로군. 발 벗고 나서겠다는 건가. 얼마나 무마할 수 있지, 세 번, 네 번?” “씨발, 너!!” “이건, 네 말대로 협박이야. 네놈들 그 좋은 머리는, 이럴 땐 도통 돌아갈 줄을 모르는군. 나는 네놈들에게 여러 번 경고를 했지.” 충두 놈아, 어리석게 굴지마라. 나는 그놈 살리고 싶다. 제대로 사는 꼴, 봐야하지 않냐. 그놈, 네 말대로 죽이게 잘난 놈인데, 평생 집착에 빠져 살게 할 수는, 나는 없다. “......그놈, 요즘 학교에서 끝내주게 웃고 다니는 거 아냐.” “큭, 원래 웃기야 잘했잖아.” “잔인한 새끼, 다르다는 거 아는 놈이.” 주머니를 거칠게 뒤지는 충두 놈. 이내 구겨져서 나오는 담배갑이, 흔들린다. 떨리는 손이라니.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네놈 모습, 이제껏 보여준 적 없잖아.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때, 한비류?” “그러고 싶냐.” “.........씨발, 약은 새끼! 좆같은 새끼! 존나 재수 없는 새끼!!!” 앉아있던 의자를 걷어차 버리는 충두 놈. “엿 같은 새끼, 차라리 화인이 놈 그냥 냅두지! 죽도록 녀석 피하고, 두려워하지!! 다른 놈들은 다 그러는 걸, 너는 왜 항상 쓸데없이 둔해서!!! 그렇게 밟혀놓고 웃길래, 증오해도 좋으니 두려워만 말아달라고 내심 걱정하던 화인이 놈한테 니놈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웃길래, 네놈한테는 여지없이 단순한 화인이 놈 생각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 빌어먹을 놈이 쓸데없는 희망 갖은 게 눈에 다 들어오는데!!! 너, 왜 이렇게 잔인하냐. 그놈한테 니 새끼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거냐. 응, 이 새끼야!!!” 쓸데없이 잔정 많은 놈. 네놈 걱정 안다, 자식아. 녀석, 더 망가질까봐, 더 집착할까봐, 네놈 걱정하는 거 안다. 하지만 확실하게 끝내야했다. 마지막으로 모두 정리한 채 보내줘야지. 그래야 그놈, 어디서든 다시 살지. 나란 놈, 정 떨어져서 다시 보기 싫어지게, 확실히 녀석 심장을 뜯어내고 사라져야지. 나는, 이정도로 잔인할 수 있다, 충두야. 나는, 그럴 수 있어. “............씨발, 언제야.” “몸이 회복되는 즉시.” “제길, 나 화인이 놈한테 죽으면, 니 새끼 탓이야!” 병실 바닥에 장초를 거칠게 던지면서, 돌아서는 충두 놈. 문을 돌리려다 말고 멈칫, “......한비류, 니놈 협박 때문에 움직이는 거 아니다.” “...............” “협박은 그렇게 어설프게 하는 거 아니야, 씹새야. 니놈, 감금해버릴 수도 있었어.” “..............” “네가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협박을 했다는 걸 알면, 그 자식 내용과 상관없이 돌아버릴 거다. 놈이, 왜 모든 걸 가르쳤다고 생각 하냐, 씨발아.” “..............” “.....가서 잘살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 네 협박 실력을 보니 심히 걱정이 된다만.” “......벌써 작별인사 하는 거냐.” “그렇다는 거다, 빌어먹을 놈.” 달칵. 끝내 뒤돌아서 얘기하고 나가버리는 충두 놈. 아직 끝은 아니겠지만, “고맙다, 정충두.” 너는 들으면 화냈을 테니까, 네놈 간 후에야 하는 감사. 조금쯤 크게 문에다 외쳐도, 너는 못들었을테니까, “고맙다고, 빌어먹을!!!” Call the turn 18 화인이 녀석은 오자마자 아무말없이 잠자코 책만 읽어댔다.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모습이 지나치게 나른해보여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휘광과도 같은 빛이 창에서 녀석의 노란 머리로 떨어졌다. 르네상스의 조각상이라 한들, 녀석만은 못할 거라고 나는 웃었다. 어쨌든, 저렇게 책을 보느라 내리깐 긴 속눈썹을, 요령 좋게 떨지는 못할 테니까. “뭐 읽는 거냐.” “편집증 진단과 사례 분석.” 맙소사, 자가 진단이라도 하는 거냐. 네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 ‘편집증의 치료와 회복’일 것 같은데. “그래, 뭐라고 나와 있냐.” “의심과 망상... 따위가 증세라고 하는군.” “좀 포괄적이지 않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올리는 화인이 놈. 검은 눈이 비웃듯 흐려진다. “가령,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의자가 왜 쓰러져있었는지 궁금해 한다고 가정할 때...” 귀, 귀신같은 놈. 그거 충두가 발로 까고 간 거야, 씨발아. “누군가 나 몰래 여기에 왔었다는 증거라는 것을 내가 알아채면...” 차갑게 식는 녀석의 검은 눈. 반대로 더욱 크게 휘는 입술. 씹, 충두 새끼라니까. “탐탁치 않은 밀회였을 거라고 믿게 되어버리는 경우.......” “...............” “...가 ‘의심’에 속하지.” 녀석이 피식, 웃어버린다. 개새끼, 심장 떨리게. 그러니까 그거 때문에 줄창 책만 읽어댔냐. 빌어먹게 쫀쫀한 새끼. “그와는 달리 과대망상의 경우는...........” .....웬지 듣고 싶지 않은데. “네 환자복이 커서 쇄골이 살짝살짝 보이는데....” 헉! 녀석의 눈이 위험하게 짙어졌다. 나는 창백하게 질려서 목을 움켜쥐었다. 씨발, 환자복은 다 헐렁하다고! “....그게 날 유혹하는 걸로 보이는 경우일까.” 쩌저적. “큭, 편집증 증상이 그렇다는군.” 녀석이 굳어버린 나를 보고 입술을 휘었다. 어느새 읽던 책에서 손가락을 빼고 관심 없다는 듯 구석으로 던져버린다. 뭐, 뭔지 몰라도, 위험하다!!! “..........네놈 증세랑 유사한데.” “그래? 그러니까 정상참작을 해달라고. 나는 환자니까.” 순식간에 겹쳐오는 말캉한 입술. 축축하고 서늘한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들어온다. 맞닿은 녀석의 검은 눈이 강하게 직시해 와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크큭, 눈 감는 건 허락의 뜻 같은데?” “..........과대망상이다.” “그럼 강간이 되는 건가. 유감이군.” 녀석의 서늘한 손이 거리낌 없이 헐렁한 환자복을 들췄다. 살짝 살짝 매만지는 차가운 묘한 느낌에 소름이 돋아서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충동적이냐. 축축하고 뭉클한 느낌이 가슴주변을 맴돌았다. 언제 벗겨진지 모르게 내려가 버린 환자복의 바지-고무줄바지의 위험성에 대해 왜 병원에서는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가 무릎에 걸렸다. 녀석의 손이 거칠게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소름이 녀석의 손길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중심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팬티는 그대로 둔 채 표면적인 애무만 반복하는 녀석에게 감질나 허리를 들어올렸다. 녀석의 분신과 내 것이 살짝 부딪치자 놈이 짧게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피부에 닿는 녀석의 몸은 여전히 옷에 감싸여 있었다. 씹, 내가 팔이 이래서 못 벗기면 지 놈이 알아서 벗어야 되는 거 아니냐. 매너 없는 놈. 괜한 분함에 이를 갈면서 자꾸만 가슴 아래로 내려가려는 놈의 입술을 물고 깊이 키스했다. 만족스런 신음이 녀석의 목구멍을 울릴 때까지, 아주 깊게. 녀석의 목젖이 낮은 웃음으로 흔들렸다. 천천히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녀석의 목젖에 갖다 댔다. 혀에 닿는 목젖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잠자코 녀석의 목을 핥던 나를 내버려두던 녀석이 거칠게 나를 눕혔다. 그제서야 급하게 풀어져나가는 놈의 남방을 만족스럽게 보면서 킬킬댔다. 너만 놀아본 줄 아냐. 어디서 시간을 끌어, 씹새야. 녀석의 눈에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서서히 거칠어지는 놈의 숨소리를 즐기면서 몸을 비틀었다. 스스로도 모를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녀석의 길다란 손가락이 가슴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서늘한 감각이 팬티에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휘었다. “윽!!!” 오른쪽 팔에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어느새 피가 배어나는 링겔 바늘이 박힌 팔을 보면서 녀석이 작게 씨발,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놀랄 새도 없이 팔에서 솟아나는 피로 향하는 녀석의 혀. 으악, 이 변태새끼!!! 아픔보다도 찌릿 거리는 묘한 느낌이 팔에서 올라왔다. 간지러운 느낌에 움찔거리면서 녀석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태에서 안지는 못하겠군.” 하지만 말과는 달리 상당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당황해버린 것은 나. 씹, 덮쳐지던 나도 흥분했는데 뭐야. 저 새끼, 고자 아냐. “그렇게 불만 섞인 표정은 곤란하다고.” 녀석이 진심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표정과는 달리 무섭게 솟아오른 중심을 보고 경악하는 내게 재밌다는 듯 웃어보였다. 씨발, 졸라 크네. “.........경고하는데.” “.........그 모습은 기대하는 표정 같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이 얼굴이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냐고!!! Call the turn 19 녀석이 불러왔던 의사가 팔에서 뿜어지는 피를 보고 핼쓱해져서 뒤로 넘어갔던 일 이후로 나는 순조롭게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링겔은 떼어냈고, 조금씩이지만 목발을 짚고 걷게도 되었으니 소심한 담당의가 경악했을 정도로 나는 회복 속도가 빨랐다. 이대로면 2주 쯤 후에는 퇴원도 가능하겠다고 눈 꼬리에 감정을 매어달고 말했었지. 하긴, 감정이 없을 리 없는 건가. 하지만 매번 화인이 놈 앞에서 쪼는 젊은 의사를 보는 것은 꽤나 유쾌했다. 가끔 근육주사라도 놓을 때면-보통은 간호사가 하지만 그것만큼은 눈에 살기를 띄는 화인이 놈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엉덩이가 걱정될 정도로 주사를 잡는 의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위해서 -‘개인 병실의 한모씨, 의사의 수전증으로 엉덩이에 주사바늘로 피 봐...’로 시작되는 기사는 절대로 원하지 않았으므로- 화인이 놈을 죽을 각오로 밀어내야 했다. 나갔다와서는 내 엉덩이를 걷어찰 듯이 노려보는 녀석을 보는 것은, 물론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지만. 내가 어설프게나마 오른 쪽 다리의 체중을 목발에 싣는 연습을 하는 동안 학교는 봄방학을 맞았다. 화인이 놈은 ‘용케 진급했군’하고 한쪽 눈썹을 올려대서 내게 눈총을 샀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냐, 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녀석이 슬쩍 눈을 휘어버렸으니까. 녀석은 적어도 병실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처럼 굴었는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는 그 다정함에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물론 가끔 오랜 습관처럼 입가를 뒤튼다거나 눈썹을 들어올리는 행동을 했지만 그다지 의미가 실리지는 않았다. 또한 아주 가끔은, 녀석의 검은 눈이 웃음기를 담고 가늘어지기도 했고 불도 붙이지 않고 입에 문 얇은 담배 끝이 녀석의 낮은 웃음으로 흔들리는 일도 있었다. 나는 잠자코 예의바른 어린 아들처럼 굴면서 굳이 그런 어색함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녀석은, 굉장히 새로웠다. 놈은 내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나를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 의자에 거만하게 기댄 채 의미 없이 문 담배를 빙글빙글 돌려대면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녀석의 시선은, 황당하게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엄한 느낌을 들어서 나는 한사코 녀석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녀석의 표정은 그럴 때마다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눈썹을 찌푸리면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시간은 평화로웠다. 모든 관계가 차단된, 놈과 두 사람만의 나날은 어쨌든 지독하게 빨리 흘렀다. 중간에 한번, 예의 불시에 찾아든 충두 녀석이 화인이 놈이 낮게 웃는 모습을 보고 무섭게 나를 노려봤다. 충두 놈의 표정은 물론 힐책과 자책감이 범벅되어 있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화인이 녀석의 극히 드문 웃음이 그때조차 나를 향해 있었으므로. 충두는 그 후로 다시 병실을 찾지 않았다. 녀석이 다시 오는 날은 마지막일 터라고 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내심 계원이 녀석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은 태어나길 범으로 태어난 놈이었다. 어떠한 면으로는 화인이 보다 강한 녀석이란 것을 나는 알았다. 녀석이 병실에 왔던 그 마지막 날에, 결국 녀석은 마침내 웃었으므로, 문을 닫고 나서던 그 단호함을 나는 어쨌든 믿었다. 하지만 가끔, 지금처럼 메마른 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오면 가슴에서도 차가운 것이 굳었다. 열린 창으로 상체를 숙이는 화인이 녀석을, 녀석의 흩날리는 눈부신 머리칼을, 녀석에게로 떨어지는 빛무리에, 계원이 녀석의 눈빛이 겹쳤다. 물론 나는 가볍게 상념을 떨궜다. 언제 병실을 나갔는지 화인이 놈이 보이지 않았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서둘러 목발을 짚어 병실을 나서면서 입원한 후로 처음 보는 병원 내부에는 그러나 도통 관심이 없었다. 녀석이 없는 틈에 도망 나온 주제에 실은 녀석을 찾고 있는 스스로를 조소하면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목발을 옮겼다. 시끄러운 응급실, 환자 가족들이 재잘대던 복도, 된장국 냄새가 진동을 하던 식당을 지나서 아직 싸늘한 공기를 품은 병원 밖으로 나섰다. 눈부심에 미간을 좁히자 밀고나온 유리문이 무겁게 등 뒤에서 닫혔다. 그저,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그새 굳어버린 몸 근육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만. 얇은 환자복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를 느낄 새도 없이 목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도 했다. 밝은 햇살무늬가 녀석에게 엉켜들었다. 내게 옆모습을 보이며 앞의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던 화인이 놈이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얼굴이 재밌다는 듯 웃는다. 씨발, 저 새끼는 나와서도 저렇게 웃고 다녔단 말야?!! 녀석의 표정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얼굴이 흰 여자. 절뚝거리며 다가가서는 그 여자를 향해 목발을 세게 휘둘렀다. “꺄악!!” 어차피 맞지도 않은 주제에 비명을 지르며 여자가 화인이 뒤로 숨었다. 흘낏 여자를 돌아보는 녀석의 눈이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이봐, 놈의 싸늘한 시선을 봤다면 그렇게 그 옷깃을 쥐고 있진 못할 텐데. 하지만 녀석의 옷깃을 쥔 여자의 손에 괜히 이를 갈며 이번에는 화인이 놈에게 목발을 휘둘렀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팔에서 뚜두둑 하는 뼈 소리까지 들렸다. 타악, 하고 묵직한 무게가 목발 쥔 손을 찌르르 울렸다. 여유롭게 목발을 막은 팔을 내리면서 녀석은 눈썹을 꿈틀했다. 꽤나 지독한 통증이었을 텐데 신음하나 흘리지 않는 녀석 뒤에서 되려 숨어있던 여자가 째지는 비명을 질렀다. 정신병자 어쩌고 하면서. “무리하지 마라.” 녀석의 비웃음이 확연해졌다. 분노가 머리를 휘몰아쳐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재차 목발을 휘둘렀다. 벌써 팔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탁. 그러나 녀석이 이번엔 얼굴을 굳히면서 목발의 끝을 잡았다. 녀석의 눈에 순간 살기가 어렸다. 상대에게 위협을 가하는 눈. 휙. 녀석이 목발을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순식간에 잡아 당겼다. 그 반동에 목발을 놓치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몸을 녀석이 안 듯이 받았다. 다리가 굽혀진 탓에 녀석의 가슴 앞부분에 얼굴을 박으면서 나는 이를 갈았다. 지금 또 때리면 넌 인간도 아니라고. “씨발, 놔라.” “움직이지 마. 다친다.” 녀석에게서, 어느새 싸늘한 표정은 사라지고 며칠간 10년보다도 더 익숙해진 표정이 떠올랐다. 놈의 눈이 빛나며 입술이 휘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 뒤에서 얼굴이 질린 채 서있는 여자를 험악하게 가리키며 외쳤다. “저년 뭐냐. 누군 가둬놓고 재미보고 있었냐.” 제기랄, 그렇게 웃음으로 홀려도 소용없어, 씹새야. 저기 저렇게 증거가 있는데. “크큭, 한비류.” 녀석이 낮게 웃었다. 눈이 부드럽게 날 내려다 봤지만 나는 죽일 듯이 영문을 모르는 못생긴(?) 여자를 노려봤다. “설마, 질투하는 거냐.” “아니, 나도 같이 재미 좀 보자고.” 녀석이 재밌다는 듯 웃어대자 나는 얼굴을 굳히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여자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인이 놈은 순식간에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뒤의 여자에게 차가운 눈빛을 날렸다. 여자는 크게 몸을 떨더니 분노한 기색으로 뒷걸음질 쳤다. 덤벼들거나 따지지 않는 면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긴 한 모양이었지만. “눈 좀 높이지 그러냐. 창녀 같잖아.” “쿡.” “뭐냐.” “역시, 질투 맞군.” 녀석의 웃음이 깊어지자 나를 지탱하고있는 녀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꺽-, 숨막힌다. 씨발, 근육끼리 닿는 느낌이라니, 소름끼치잖아. “큭, 예뻐해 주지.” 헉. 그야말로 변태 같은 대사를 뱉어내면서 화인이 놈은 거칠게 나를 끌었다. 녀석에게 끌려 한쪽발로 쿵쿵 뛰어가면서 -상당히 우스웠을 거라는 점은 굳이 밝히지 않겠다- 바둥거리다 후려쳐진 등은, 물론 무시무시하게 아팠다. 이 새끼, 이거 괜히 할말 없으니까 수 쓰는 거 아냐, 라고 나는 여전히 그 여자와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쿵쿵 뛰었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녀석에게 끌려가는 나를 쳐다봤지만, 씨발, 도와줄 생각 아니면 눈 돌려! Call the turn 20 녀석이 끌고 들어온 나를 침대에 던지고는 급하게 자신의 남방 단추를 풀었다. “사정은 봐주지 못하겠군.” 녀석의 시선이 다소 불안하게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남방을 거칠게 던져 보인 녀석이 내 몸 위로 서둘러 올라왔다. 녀석의 조각 같은 상체에 새삼 감탄하며 녀석의 손이 환자복 상의를 잡아오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녀석의 손을 잡아 제지하자 낮게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비류......장난은 정도껏해라.” 녀석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으르렁거리는 녀석의 숨결이 얼굴로 느껴졌다. “나를 초조하게 하는 게 재밌는 거냐.” 비틀린 미소를 만들어내는 녀석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부터 끄라고.” 씨발, 깔리는 쪽은 난데 쪽팔리게 너무 밝지 않냐. 불을 끈 병실 안은 여전히 밝았다. 그야, 창문으로 빛이 훤히 새어 들어오고 있으니. 커텐을 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자 녀석의 서늘한 입술이 닿았다. 이가 부딪칠 정도로 거친 키스가 입안을 휘저었다. 입천장을 강하게 훑는 녀석의 혀를 마주 감으면서 격렬하게 녀석의 입술을 탐했다. 녀석도 나도, 며칠간의 어울리지 않는 금욕생활에 금방 달아올랐다. 키스에 서버린 분신이 이미 민망할 정도로 커져있던 녀석의 것에 맞닿았다. 녀석이 신음을 삼키며 그것을 비벼왔다. 윽, 이 새끼 나보다 지가 더 급하면서 죽으려고. 헉, 하고 갑작스런 쾌감에 몸을 떨었다. 녀석의 입을 탐하던 내 혀가 움직임을 멈추자 녀석이 입술을 떼고 짓궂게 웃었다. “아무래도 리드당하는 기분은, 별로군.” 다시 입술을 겹쳐오며 녀석이 움직였다. 처음과 달리 여유롭게 움직이는 녀석의 손에 녀석과 나는 어느새 알몸이 되었다. 몸에 닿는 녀석의 피부는, 입술과 손처럼 차가웠다. 근육이로 꽉 짜여진 녀석의 등을 깁스 안한 쪽 손으로 쓸면서 녀석의 입술과 손이 배꼽 주변을 배회하는 느낌을 즐겼다. 나쁘진 않았다. 간질간질하고 감질 나는 느낌. 지속적으로 페니스끼리 비벼진 탓에 이미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흥분해 있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씹, 내가 여자도 아니고 이따위 애무보다 사정이 급하단 말이다. 조급한 마음을 읽었는지 녀석이 서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었다. 얼굴과는 달리 녀석의 것도 터질 듯 부풀어 뿌연 액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 강한 인내심이로군. “윽........빨리.........안.....하면......내가......해버..린다.......” 부풀어 오른 페니스에서 찌릿한 고통마저 올라오자 나는 힘들게 중얼거렸다. 녀석이 서서히 욕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괴로운 미소를 짓더니 내 허벅지로 서늘한 손을 감았다. 급한 정신에 쪽팔림은 생각도 않고 자진해 다리를 벌리며 녀석의 허리를 감았다. 진심으로, 아름다운 녀석을 갖고 싶었다. 녀석의 흔들리는 노란 머리가 땀에 젖었다. 녀석의 검은 눈에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느껴졌다.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깔리는 주제에 우습게도, 녀석의 이성을 무너뜨렸다는 쾌감. “으헉!!!” 끔찍하게 뜨겁고 커다란 고통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녀석의 팔을 하얗게 될 정도로 강하게 쥐면서 이마에 땀이 차 올랐다. 무식한 새끼, 윤활제라는 것도 모르냐. “윽......씹........헉!!!” 비명을 삼키며 몸을 비틀자 녀석의 반도 들어오지 않은 것이 뿌리까지 들어왔다. “으억!! 컥!!!” 고통이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울렸다. 눈물이 차올라 눈이 벌게졌다. “윽.......한.....비류..........비류.......야.....” “부르...으억...........헉.......지.........읏......마.......새끼......” “헉........읏......” “......큭.....제길..........으헉....” 녀석이 거침없이 자신의 것을 흔들기 시작했다. 리드미컬하게 녀석이 허리를 흔들면서 강하게 자신을 몰아 붙였다. 어느샌가 녀석에게 동조하며 고통으로 입을 벌렸다. 녀석이 내 아랫입술을 세게 물자 녀석 혀의 까칠한 느낌이 입술에 남았다. 조금씩, 찌릿 거리는 쾌감을 동반한 고통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녀석의 목에 깁스하지 않은 팔을 두르며 지독히 관능적인 녀석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씹, 아프기만 했으면 깁스로 뒷통수를 내려져줄텐데. 녀석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자 녀석이 몸을 흔드는 중에도 웃어온다. 죽여주게 섹시한 놈. 눈웃음치지 마, 새꺄. 따먹는 새끼가! 고통으로 죽었던 페니스가 허리를 따라 올라오는 쾌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것은 이미 사정을 했는지 따뜻한 것이 몸을 채웠다. 하지만 다시 무섭게 커져오는 녀석의 것. “씹, 돌아버리게 아프다.” “그래서, 싫냐.” “.......또 하는 건 싫군.” “큭, 거짓말로 들리는데.” 녀석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처음 보는 따뜻한 빛이, 녀석의 검은 눈에 맺혔다. 가슴이 괜히 시려서 나는 다시 허리를 놀렸다. 휘둥그레지다가 기분 좋게 웃어버리는 화인이 놈에게, 그렇게 죽이게 웃지 마라.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줘서, 어쨌든 고맙다. “큭큭큭, 한비류. 너 지금 돌아버리게 예쁘다.” “그 따위로 웃지 마라. 진짜 변태 같다고.” Call the turn 21 작은 창이었다. 실제로 병실에 나있는 창은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나는 작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화인이 녀석이 창을 열고 상체를 숙이곤 했지만, 나는 무엇을 보는지 묻지 않았다. 나무, 혹은 하늘이었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병원 주변에 들어선 건물들도 잘 보였을 것이다. 목발로나마 움직이게 된 후로도, 나는 여전히 창에 다가간 적이 없었지만. 창으로 어둠이 흘러내렸다. 새까만 것이 병실을 꽉 채우도록 녀석과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찐득찐득하게 닿아오는 땀도,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정액도, 불쾌한 느낌을 주는 서로 엉킨 팔다리도, 어둠에 녹아들었다. 귓가에 녀석의 숨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때, 너는 나를 신처럼 봤다.” “........웃기지 마.” “....아니면 아버지던가. 어쨌든 곤란할 정도로 나를 믿어버리더군.” “.......기분 좋지 않았냐.” “오히려, 영원히 너를 갖지 못할까봐 초조해졌지.” 큭큭하고 녀석이 웃었다. 가슴근육의 흔들림을 머리로 느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녀석의 피부는 서늘하다. “그래서 죽도록 팼냐.” “..........강하게 만든 거다.” 녀석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헤집었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런데 막상 강해진 너는 못말리는 카사노바더군.” “크크큭.” “더구나 그 후에는 물론 날 신처럼 보지는 않았는데.......” “아아.” “.......마치 날 미친놈처럼 대하던걸. 돌 지경이었지.” 너 미친놈 맞잖냐, 새끼야. “한비류...........” “왜.” “......이거, 뭐냐.” “..................” “크큭, 동정인건가.” 녀석이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씹, 아프다. 이 새끼, 악력 장난 아니다. “뭐, 좋겠지.” “............” “그런데 너는 아무한테나 뒤도 내주는군.” 어둠 속에서 녀석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작게 한숨이 나왔다. 이 새끼는 깔려줘도 지랄이다. “한비류......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나야말로 널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다.” “크크큭, 정말 대가리가 컸어.” 녀석이 정말 재밌다는 듯 웃어댄다. 가슴이 들썩여져서, 머리가 흔들렸다. “니놈 정말 매너 꽝인 거 아냐. 뒤처리는 니가 해야되는 거 아니냐.” 참을 수 없게 몸이 찝찝해져서 허리의 욱씬거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머리를 들었다. 홱. 윽. 머리를 들자마자 녀석의 손이 거칠게 끌어당겨서 녀석의 가슴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씨발. “.........움직이지 마.” “권화인......너 나 사랑하냐.” “아니.” “그래. 고맙다.” “크큭, 고마운 거냐. 고맙다고...크크큭.” “웃지마, 머리 울린다.” “머리 굴리지 마. 정말 그 머릴 날려버리고 싶다.” “권화인.” “도망갈 생각하지마라. 꿈도 꾸지 마.” 녀석의 손에 힘이 점점 더 강해져 머리가 눌렸다. 하지만 나는 신음도 낼 수 없었다. 그래, 이번엔 정말 넌 날 죽이고 싶겠지. “........사랑이 뭐냐, 권화인.” 응, 정말 그게 뭘까. “.......사기연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놈은, 멍청했다니까.” 녀석이 심드렁하게 답한다. 하지만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팔에 힘이 들어간다. 아프다, 권화인. 권화인, 니가 안을 때도 사기연 그랬냐. 푸른 기가 돌 정도로 흰 피부가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작게 떨렸다. 그 동그란 검은 눈은 눈물을 가득 매어달고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조그만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키는 녀석에게 나는 키득대며 입을 맞췄다. 마치 작은 새 같아서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권화인, 네게 안길 때도 사기연이 떨리는 손으로 목을 감아왔냐. 그 자식,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냐. “..........벌 받을 거다.” “큭, 네가 벌을 줄건가.” 녀석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는 못해. 아니, 어쩌면. “헛소리 하지 마. 너도 자격은 없어.” 잔인하게 입술을 비트는 권화인. 아름다운 권화인. 차가운 권화인. “너는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아.” “너를 가지는 데엔 필요 없는 것들이군.” 녀석이 거칠게 입을 맞췄다. 얼얼할 정도로 강한 녀석의 키스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느새 창에서 차가운 달빛이 비춰들고 있었다. 그것은 일년도 되지 않은 기억. 사기연은 햇살이 나른한 양호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눈에 왠 계집애 같은 면상이 들어오자 나는 당황했던가. 녀석은 갑작스레 눈을 뜬 내게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붉은 기가 퍼지던 그 흰 볼이라니. “발이 침대 밖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달랑거리길래 귀여워서.....” 후에 사기연은 이렇게 말했다. 기가 막히게도, 180cm만 넘어가도 맞지 않을 정도로 양호실 침대는 작았기 때문에 조금쯤 발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발 크기라면 화인이 놈에게도 지지 않는 내 발을 보고, 맙소사, 귀엽다니. “비류야, 싸우고 다니지 마. 다른 사람 패는 것도 싫고 맞는 것도 싫어. 아니, 물론 맞는 것보단 때리는 게 낫지만.......” 어물어물거리면서 녀석은 이런 말도 했었다. 내가 피식 웃어버리자 큰 눈을 더 크게 뜨면서 눈썹을 모았지. 뭐라고 더 시끄럽게 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은 안난다. 나는 부드러운 주름을 만드는 붉은 입술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은 5년도 더 된 기억. 권화인은 내가 밟히는 것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 그네 기둥에 등을 기대고 나를 괴롭히던 동네 돼지 녀석들이 그 육중한 무게를 실어 몇 번이나 내 몸을 걷어찼었는데, 놈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충두 놈이나 계원이 놈이 있었으면 틀림없이 저 돼지 녀석들을 떡을 쳐줬을 텐데, 녀석들은 마침 그곳에 없었다. 슬금슬금 화인이 녀석의 눈치를 보던 돼지 삼형제는 놈이 별달리 상관하려하지 않자 맘 놓고 나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욕설을 섞어서 둔탁한 아픔을 주는 살집 많은 주먹이나 발보다도, 나는 연신 화인이 놈에게 이를 갈았다. 냉정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줄이야. “야, 이 새끼들아! 늬들 뭐야!!!” 녀석들의 엉성하지만 꽤 무게가 담긴 발길질은 충두와 계원이 놈이 도착하고서야 멈춰졌는데, 물론 충두 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안도감보다도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씨발, 이 더러운 새끼들이!! 누구 몸에 손을 대?!!!” 물론 정확히 말하면 발이었지만-ㅁ-;; 부어터진 눈으로도 돼지 녀석들이 험악한 욕설을 내뱉는 충두 놈보다 묵묵히 주먹을 내뻗는 계원이 놈에게 더 많이 얻어맞는 것이 보였다. 계원이 놈은 감격스럽게도 그 굳건한 미간을 접으며 녀석들을 팼는데, 흠씬 맞은 돼지 녀석들이 도망간 후에도 그 표정을 풀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씨, 권화인!! 너 왜 비류가 맞는 데 보고만 있어?!! 이 새끼 얼굴에 흉지면 니가 책임질 거야, 어?!!!” .......물론, 조금 논점이 틀린 것 같긴 했지만........(계집애도 아니고 흉이라니;;;) 어쨌든 내 몸을 일으키며 화인이 놈에게 눈을 부라리는 충두 놈에게 감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심 화인이 놈에게 화가 나 있었기에 대신 따져주는 충두 놈이 고맙기도 했다. “...........시끄러.” 나참,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인이 놈은 되려 미간을 접으며 신경질을 냈다. 뭔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는 놈 때문에 나는 내심 굉장히 섭섭했다. 무서워서 그랬다고만 말했으면 용서해 줄 텐데, 라고 아직 놈의 실상을 모르던 나는 황당한 생각까지 했다. 어쨌든 겉보기로야 예쁘게 생긴 놈이었으니까. 한참을 나대신 따져대던 충두 놈이 나중에 일러준 말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 했었지. “저 새끼, 니가 도와달라고 안 해서 삐진 거야.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봐.” 씨발, 다시 생각해도 그놈 미친놈이다. Call the turn 22 눈에 차갑고 축축한 것이 살짝살짝 닿는다. 간지러운 느낌에 잠결에도 눈썹을 찌푸렸더니 피식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넌 잠도 없냐.” “큭, 넌 겨울잠 수준이다. 벌써 열시야.” 씨발, 하고 마지못해 눈을 뜨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온몸이 끔찍한 고통을 자아내서 눈앞에서 다정한 빛을 띄고 있는 화인이 놈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움찔거려도 찌르르 하고 내달리는 아픔. 엉덩이에선 화끈거리는 열기. 제길, 피는 안났었는데. “노려보지 마라. 정말 강간이라도 해버리고 싶어진다.” “누가 당하긴 하냐. 더구나 어제도 충분히 거칠었어, 새끼야.” “아아, 남자 경험은 별로 없어서.” “씹, 그럼 미리 연습이라도 하고오던가. 넌 여자한테도 콘돔도 없이 하냐.” “.......거기까지. 더하면 죽는다.” 차라리 죽여라, 씨발 새끼. 갑자기 왜 또 얼굴은 굳히고 난리냐. 오지게 변덕스런 새끼.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서늘하게 부딪쳐오는 검은 눈을 피하고 말았다. 역시 무리다. 저 눈을 정면으로 받는 것은. 하긴, 우습군. 정말 억지로 당한 것도 아니면서 계집애처럼 깽알대다니. 한번 깔리더니 가지가지 하는군, 나도. 잠시 싸늘한 빛을 띄우던 녀석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 졌다. 정수리에 입술을 가져가더니 부드럽게 닿는 축축한 감촉. 이마에 입술을 대고 혀를 굴리는 녀석. 코끝에 살짝 하는 장난스런 키스. 풋, 이 새끼, 진짜 돈 새끼다. 너나 나나 이런 귀여운 키스가 어울리냐. “크큭, 눈썹 꿈틀거리는 버릇 여전하군.” “뭐.” “너 뭔가 맘에 안들면 여기.......” 오른쪽 눈썹에 다시 살짝 키스하고 웃는 화인이 놈. “....이 눈썹이 움직인다.” “........몰랐다.” “......한비류.” “왜.” “평생 이렇게 널 가둬두면, 안되는 거냐.” “나한테 선택의 기회가 있는 건가.” “아니.” 녀석이 부드럽게 입술을 휜다. 마음이 또 아릿해져서 마주 웃어주었다. 선택의 기회가 없는 건.............. 너야, 권화인. 하루 종일 침대 옆에서 서성대던 화인이 놈은 험악하게 입술을 비틀며 핸드폰을 받더니 나가버렸다. 짐작하건대, 일주일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집에서 전화한 것이었으리라. 만약 전화 상대가 화인이 놈의 형이었다면, 끔찍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내놓은 자식인건가. 화인이 놈보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니. 막상 비교 대상이 화인이 놈이 되자, ‘아니, 내가 정말 그 놈보다 막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거야’고 괜한 화가 나버렸다. 불퉁한 얼굴로 툴툴거려 봤자, 핸드폰도 없는 지라 어차피 연락이 닿지도 않았겠지만. 똑똑. 명확한 두드림. 힘 조절을 잘 하는군. 보통은 처음 소리와 두 번째 소리에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문을 쳐다보자 슬며시 열리는 문으로 낯선 얼굴이 들어섰다. 으악, 맙소사!! “어머, 역시 너 맞구나!! 누가 널 봤다길래 긴가민가했는데.” 현주연이었다. 그녀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물론 호기심을 잔뜩 매어달고- 붕대로 둘둘 말린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웃었다. 잠깐, 이거 정말 위험한 상황 아닌가. “근데 너 왜 이렇게 다친 거니? 너 싸움 잘한다는 거 구라였지?” “..........나 갈구러 왔냐.” “흐응, 실은 친구 문병 왔는데 그 친구가 널 봤다길래 와 본거야. 접수대에서 아무리 물어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아서 힘들었어. 무슨 저명인사도 아닌데, 너무 하던걸?” 한숨이 나왔다. 여전히 수다스러운 그녀. 이봐, 지금 찾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조금만 빨랐어도...헉.(생각하지 말자.) “어쩐지 연락이 안된다 했지. 아예 미라 같구나.” 그나마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란 걸 안다면 경악할까. ..........아니다, 이 여자는 절대 그런 성격이 아니다.(오히려 재밌어 할 듯.) “정말 골고루도 얻어터졌구나. 울긋불긋에 푸르딩딩에........어?” “야.” “어머, 너 잠깐 옷 좀 걷어봐. 내가 지금 키스 마크 본 거니?!!” 씨...씨발. 화인이 새끼, 어쩐지 목 주변을 빨아대더라니. “너, 설마...........” “뭐.” 얼굴 가득 의혹을 담은 주연에게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사내놈에게 깔렸다는 건, 죽어도 비밀이다. “간호사랑도 일 치룬 거니? 어쩐지,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더라니. 누구니? 얼굴 까만 간호사? 아님, 키 큰 간호사?” “................” “근데 그 키스마크는 대단하구나. 입심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너 진짜 뭐하러 온거냐.” “칫, 모르겠니? 질투하는 거잖아. 암튼, 무심하기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런 말 하면, 설마 믿으라는 건가. 주연이 즐겨 피는 던힐을 빼들며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 고개 숙인 얼굴로 긴 머리가 쏟아졌다. “.........뭔가 변한 것도 같네.” “......현주연.” “뭐, 이럴 줄 알았어. 마지막으로 좀 확인해 보고 싶어서.”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주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에 담배를 걸고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았다. “멋진 남자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야, 너는.” “아니, 누구도 가질 수 있는 남자가 좋겠는데.” “쿡, 아랫도리 간수만 잘 해도 정말 괜찮을 텐데. 이 바람둥이.” “.........상처가 되는데.” “흥, 됐어. 이번에야말로 뻥 차주지.” 즐겁다는 듯 그녀가 웃는다. 늘 잊고 있지만, 어른이란 그런 거겠지. 현주연, 너는 멋진 여자다. “비류야, 니 사람을 찾아. 너는 간혹 정말 소중한 걸 몰라. 잘난 척하고 강한 척 하면서, 소중한 걸 놓아버리면 그건 정말 강한 게 아닌 거야.” “......나이 먹은 거 티 내냐.” “너는 상처가 없어. 이상하게도 너는 그런 게 없어. 뭐든 네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지. 그건, 근데 좋은 게 아니야. 너는 분명 사랑이 와도 피식 웃어버리곤 무시할 거야. 너는, 정말 그러고 말거야.” 그녀의 손끝에서 담배가 타들어간다. 얇고 흰 줄을 만들어내는 담배연기. “작별인사로 키스나 해줘.” “흥, 이제 가라는 거지?” 그녀가 눈을 흘기면서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꺼버린다. 하이힐 아래 밟힌 하얗고 가는 담배. 아니, 더러워지고 찌그러진 담배. “참, 얼마 전에 누구한테 연락 온지 아니?” 뒤돌아서다가 멈칫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현주연. “사기연이랬던가. 니가 만나던 그애.” “.............사....기연?” “응, 걔 말야. 물론 걔한테 직접은 아니고 걔 친구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내 번호를 알아냈더라고. 아무래도 좀 조사했던 모양이야.” ...........조사라고. 현주연을 알아냈다니, 보통이 아닌데. “니 연락처를 묻길래, 나도 요즘 연락이 안된다고 그랬었거든. 어쩔까, 다시 연락한다고 그랬는데 여기 알려줘?” “아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 나를..........찾아? “............부탁해.” “훗, 알았어.” 그녀는 문을 닫기 전에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붉은 입술이 웃는다. “멋진 남자가 되면, 연락해.” “지금도 멋지지 않아?” “흥, 네 바람기를 커버하기엔 부족해.” 콧등을 작게 찌푸리더니 사라지는 예쁜 얼굴. 닫혀 지는 문. 달칵. “뭐야, 왜 다시......” !!!!!!! !!!!!!!!!!!!!! “.....이런 걸, 현장 목격이라고 하나.” 문에 등을 기댄 채 비웃는 표정을 짓는 권화인. 녀석의 검은 눈은, 그러나 얼음같이 차갑다. 오싹, 몸이 떨렸다. Call the turn 23 문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녀석이 서서히 주연이 앉았던 의자 곁으로 다가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본 녀석의 시선 끝엔, 주연이 버리고 간 붉은 립스틱이 묻은 장초. 화인이 놈의 비웃음이 깊어졌다. 하지만, 두 손은 아직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재미가 좋으셨군. 내게 깔려서 신음을 흘려대던 그 몸으로, 이번엔 여자를 품었다라..” “권화인, 함부로 말하지 마라. 아니라는 거 알잖아.” “글쎄, 그런가. 크큭, 빌어먹을.” 목울대를 울리는 낮은 웃음.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향해 웃음을 흘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녀석의 얼굴을 가렸다. “한비류, 넌 날 미치게 해.” “..................” “실제로 몇 번인가, 죽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녀석이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웃었다. 웃을 때마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흔들렸다. 화려한, 노란색. “잡았다고 생각하면, 등 뒤에서 나를 비웃고 있지.” 글쎄, 지금 비웃고 있는 건 너야. 스스로를 비웃고 있는 건 너다. “너는 독 같다. 조금도 달콤하지 않아.” 그래, 그러니 나를 놔라. 나는, 적어도 나를 향해 뛰는 네 심장은, 확실히 죽일 거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검은 눈을 맞춰온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 먹먹하기만 한 어둠. “..................변명해봐.” “...................” “...........크.......크큭..........큭큭큭......” 이마에 손을 올리며 녀석은 웃었다. 병실 안에 흘러내리는 마른 웃음. “..........왜냐.” “...........권화인.” “...........그 여자, 살리고 싶지 않나.” “....권화인!!” 녀석의 눈이 싸늘한 빛을 띈다. 입가가 깊이 비틀어진다. “............손 댈 필요 없는 여자야.” “.........그래.” “............우연히 찾아 온 것뿐이다.” “..........계속해.” “........권화인, 그 짧은 시간에 아무리 나라도 이런 몸으론 무리다.” “........큭, 그건 올바른 대답이 아니군.” 녀석이 가까이 다가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턱에 녀석의 서늘한 손이 닿자 흠칫 몸이 떨렸다. “.............널, 믿도록 하지. 그래, 그럼 뒹굴지도 못하는 몸으로 뭘 한거지.” “이별.” “후, 영리하군.” 못당하겠다는 듯이 녀석이 드디어 웃는다. 이번에는 다정하게 되돌아온 검은 눈. 부드럽게 닿아오는 입술. 입술 양쪽을 간질이는 녀석의 혀. 얼굴선을 쓰다듬는 녀석의 두 손. ....왠지, 정말 여자가 된 기분인데.(제길.) “그런데......이건 어떻게 처리해 줄거냐.” 무섭게 달아오른 페니스를 가리키며 난처하다는 듯 웃어도, 씨발, 니 새끼, 분명 전생에 변광쇠였을 거다. 어떻게 고작 키스에 스냐!! “권화인, 오늘 시간 있냐.” 녀석이 정말 놀랬는지 읽고 있던 책에 담뱃재를 떨어뜨렸다. 창가에 앉아 나른하게 책을 읽던 녀석의 거만하게 문 담배가 흔들린다. “시간 있으면, 데이트나 하자.” 툭. 얼씨구. 이젠 아예 담배채로 떨어뜨리는군. 새끼야, 책 위에 떨어진 담배부터 처리해. 불나겠다. “.........무슨 수작이냐.” 얼굴을 궂힌 채 책을 바닥으로 던져 밟아버린다. 아니, 물론 담뱃불을 끄려는 생각이었겠지. 너는 늘 황당하다. 그게, 너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일까. “왜 그렇게 놀라는 거냐. 단순히 놀러가자는 건데.” “..........진심이냐.” 녀석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왜, 입술조차도 비틀지 않는 거지. “병원에만 있으려니 심심해서. 어디 놀러나 갔다 오자.” “후.” 녀석이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한숨처럼 내쉬어지는 담배연기. “........그러니까, 단지 놀고 싶다는 거냐.” 입술 끝으로 빙글빙글 담배를 돌리는 녀석. 어느새 눈이 웃고 있는 것은, .............10년만에야 알게 된 사실. “그네라도 타지 그래.” 오랜만에 그네에 타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롭다. 혼자 -그것도 커다란 덩치의 놈이- 그네에 타고 있으려니 민망해져서 권했는데 화인이 놈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입술을 비틀어 버린다. 제길, 비웃는 거냐. “아직, 애로군.” “씹, 그럼 그네라도 밀어주던가. 몸이 무거워지니 잘 흔들리지도 않는다.” “큭큭, 한비류. 이거 범죄 아니냐. 엄연히 공공재산이다, 놀이터는.” 크크큭, 하고 낮게 웃어버리는 녀석. 하지만 그러면서도 등 뒤로 다가온다. 짜식, 밀어줄 거면서 말하는 거 하고는. “........발로 차서 민다거나 하는 짓 하면 가만 안 둔다.” “.................” ...............설마. 왠지 조용해서 뒤를 돌아보니 발을 치켜 든 채로 굳어있는 놈. 씨발, 구두로 누구 등을 부셔놓으려고! “.............눈치가 빨라졌군.” “..........농담이었다;;;” 휘잉-. 아, 왠지 춥다. 아무래도 저 새끼 옆에 있으면 목숨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충두야, 저 새끼, 나 좋아하는 거 확실하냐. 왠지 원한이 느껴지는데........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어버리더니 다리를 내리고 다가오는 화인이 놈. 서늘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놀이터, 오랜만이다.” “안다, 권화인. 그래서 오고 싶었다.” “.............설마, 나 집안에 그네를 만들어야 되는 거냐.” 씹, 그런 말이 아니잖아!! “큭큭큭, 농담이다.” 녀석이 뱉어내는 웃음이 목덜미에 느껴진다. 조금 몸을 떨면서, 녀석이 뒤에서 안아오는 체온을 느꼈다. .........권화인을 처음 만났던 곳. 혼날 두려움에 온몸을 저 모래위에서 뒹굴고 있었지. “...........어떤 면에선, 상당히 추한 만남이었는데.” “아아.” ..그런 건 부인 좀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빌어먹을 녀석. 아마, 그랬다. 녀석이 무표정하게 내 대신 숙제를 해주고 있으면, 나는 그네에 몸을 흔들면서 연필 꼭다리를 씹었다. 잘근잘근, 보기 흉하게 될 때까지. 덕분에 연필 끝부분에 그려진 아톰 얼굴이 사라져 버린 걸, 녀석은 몰랐을 거다. “......너는 내 대신 숙제만 했지.” “쿡, 너는 그네만 탔고.” 천만에. 나는 예쁘게 생긴 화인이 놈하고 놀고 싶었는데, 녀석은 눈도 맞춰주지 않아서, 사실, 나는 그네보다 미끄럼틀을 더 좋아했지만, 미끄럼틀에선 문제를 푸는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엉덩이가 얼얼해질 때까지 발로 그네를 밀었다. “........심각하게 그네 줄을 끊어버릴 생각도 했었다.” “..........그랬냐;;;” 하지만 너는 이것도 모르지. 숙제 많이 내달라고 난데없는 생떼를 부렸던 걸. 너는 후다닥 문제를 풀어버리곤, 곧 가버리곤 했었기 때문에. 니 놈이 다음주 숙제까지 풀던 그 어느 날에는, 시소를 같이 타달래려다가 못하고 그네만 더 세게 밀어댔지. 덕분에 지금도 엉덩이는 굳은살이 배겨있다만. “너 그네 타다가 앞으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 그랬나.” “신기했다. 혼자 그네 타다가 그렇게 날아가다니.” 제길. 생각난다. 너는 그 때 처음으로 웃었다. 어렸을 때는 온통 무표정에, 혹은 인상을 찌푸려대던 놈이 그 때에야 처음으로 웃는데, 덕분에 코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넋 놓고 보다가 괴기스러운 형상이 됐었다. 씨발, 미친놈이 남이 피 흘리는 걸 보고서야 웃다니. “아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거든.” 귓가에 녀석의 숨결이 느껴진다. .........웃는 건가. “........대체 뭘.” “섹스.” 고개를 젖히는 녀석의 강한 손. 젖혀진 얼굴로 녀석의 얼굴이 내려온다. 흐음, 추억의 놀이터에서 키스라.....나쁘진 않은데....... ..........이런 포즈는 좀 엄한걸. Call the turn 24 놀이터를 나와서 화인이 놈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목발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놓고 왔는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구나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병신 같다. 그것 조금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팠다. 주위를 둘러보니 허름한 순대국 집이 보여서 단호한 얼굴로 간판을 가리켰다. 화인이 놈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고는 내가 가리키는 곳으로 나를 부축했다. 사실 순대국을 좋아한다는 것보다도, 뭔가 따뜻한 것을 먹고 싶었다. 놀이터에 있었던 건 30분 남짓 정도인데 온몸이 얼어서, 화인이 놈의 잘생긴 얼굴 역시 바짝 얼어있었다. 물론, 조금쯤 놈을 골려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의외로 넙죽넙죽 잘도 먹었다. 나중에는 마지막 남은 깍두기를 가지고 젓가락싸움까지 벌일 지경이어서, 주인아주머니가 사람 좋게 웃으며 한 접시를 더 가져다 주셨다. 물론 녀석과 나는 쓸데없는 젓가락 싸움을 계속했다. ...........그것은, 사나이의 자존심 문제였다...쿨럭. “아유, 학생들이 잘도 먹네. 요즘 다른 젊은 사람들은 이런 걸 통 안 먹어.” 아주머니가 살집 많은 얼굴근육을 당겨 웃으며 국자로 고기를 더 그릇에 담아주었다. 그 엄청난 양에 거북스레 웃으면서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는 화인이 녀석을 살폈다. 그야, 녀석은 평소에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정말 잘생겼네. 딱 내 사위 삼았으면 좋겠는데.” 아..아니, 아주머니!! 저놈보단 제가 낫지 않습니까!!! “........저, 장가갔습니다.” 푸학!! 들이키던 순대국을 뿜어내면서 나는 눈물까지 뽑아냈다. 정작 화인이 녀석은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아주머니를 향해 지어보이며 나를 향해 살짝 비웃는 시선을 보냈다. “아니, 벌써 장가들었어? 거참, 아깝네. 색시는 예쁘고?” 아주머니가 진심으로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며 녀석을 향해 재차 물었다. “아뇨, 예쁜 구석이 없습니다. 더구나 고집도 세고, 바람기까지 있어요.” 쿨럭!! 씨발, 미친 자식!! 저거 진짜 돈 놈 아냐?!! “에고, 그래 어쩌다 그런 색시를 얻었어?” “..........큭큭, 그러게 말입니다.” “쯧쯧, 그래도 잘 다독거려서 데리고 살어. 요즘 젊은 사람들, 이혼이다 뭐다 말이 많은데 그런 몹쓸 짓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아주머니가 심각하게 말하자 화인이 놈은 고개까지 끄덕여 호응해주었다. 이내 다른 주문소리에 조급한 발걸음으로 아주머니가 사라지자 나는 이를 갈았다. “씨발, 이쁜 구석이 없다고.” “아아.” 입가를 비틀어 보이는 화인이 놈. 니미럴, 그럼 이쁘지도 않은 놈을 왜 깔아, 씹새끼.(물론 사내새끼가 이쁘다는 것도 싫다만.) “설마,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누가 그렇대냐!!! 아니, 니가 그랬잖아!! 죽이게 이쁘다고!!<--기억하고 있다. “...........예쁘지 않으니까, 노려보지 마라.” “...........오늘부터 각방이다.” 다소 험악하게 노려보니 어느새 재밌다는 눈빛을 띄우는 화인이 놈. 짓궂은 빛마저 아른거리는 듯해서 나는 조금 주춤했다. “..........큭, 잠자리 거부는, 이혼 사유가 되는데.” “..........갈라서, 새꺄!!”<--어느새 말려들고 있다.(비류야, 결혼한 건 인정한거냐;;) 으힉!! 순간적으로 녀석의 얼굴이 다가오면서 녀석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 굉장히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경악하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씹, 식당에서 무슨 짓이야!! “...좀 짜군.” 얼굴을 약간 찌푸려 보이는 화인이 놈. 순대국 먹던 중인데 당연하지, 미친 새꺄!! 넌 순대국 먹던 입술을 빨고 싶냐!!! “...말해두지만,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녀석이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조금 찌푸린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가슴이, 타는 것 같다. 씨발, 설마. “승인 형님이였냐.” “..............” “..........쓸데없는 말, 안했겠지.” “...큭..크크크...쓸데없는 말이라.” “...권화인...” “니가 바라는 대답 안했다는 건, 확실하지. 왜, 실망스러운가.” 녀석의 시선이 차갑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일어서있는 나를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엔 비웃음이 깊다. 권화인, 미친 새끼. 그건 아니다. 설사 내가 널 사랑했다고 해도, 아니잖아. “.........너 진짜 제대로 돌았군. 승인 형님 성격 모르냐.” “.....그럴 리가. 어쨌거나 피가 통하는데, 누구보다 잘 알지.” “............용납할 리 없다.” “그따위, 내가 기대하리라 생각하냐.” 녀석은 서서히 의자에서 일어서며 웃었다. 입꼬리를 비틀어 웃음을 짓는 게, 지금은 심장 한켠이 내려앉는 것 같다. “.....큭, 너로선 마지막 보루가 사라졌다. 권승인이, 너로선 구세주였겠지. 큭큭큭.” 웃음소리와는 반대로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바라본다. 녀석 특유의 여유있는 느린 걸음이, 한걸음, 두 걸음. 거기서, 권화인. 나 정말 화낼 것 같다. “정말은 상관없다. 니가 날 받아들이든 말든. 어쨌든 나는 널 가질거니까.” “..........다른 문제야.” “아니, 한비류. 그런데 이상한 건........” “...................” “...자꾸 널 시험하고 싶다는 거지.” “...................” “........가령, 내가 널 갖는다는 걸 권승인에게 말했다는 것에..........” “........미친........” “....네가 안심해주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녀석이 쓰게 웃는다. 어느새 앞까지 다가와서 서늘한 두 손으로 귀를 감싸고, 얼굴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눈에 힘 빼라. 전혀 예쁘지 않다.” “......그러니까 이혼하자고, 씨발아.” 눈을 휘어가며 웃는 화인이 놈. 웃는 얼굴과는 반대로 손에 힘이 들어간다. 농담에조차도, 화를 내는 놈. 아니, 실은 농담이 아니라는 걸아는 머리 좋은 놈. “.........큭, 예쁘지는 않은데.......” “..............” “.....돌아버릴 정도로, 갖고 싶다.” 아니, 권화인. 너는 갖지 못할 거다. 거리는 어느새 어둡다. 번쩍거리는 네온사인들로 붉은 거리를, 인파를 헤치며 걸으면서 나는 절뚝거렸다. 몇걸음만에 나를 따라잡는 녀석의 넓은 보폭을 속으로 세면서, 나는 녀석의 손을 끌어 잡았다. 의심스런 시선을 피해 서둘러 식당을 나오고 나서 줄곧 걷고 있었다. 조금만 시선을 딴데로 보내도 위협적으로 빛나는 화인이 놈의 시선 때문에 바닥을 보며 걸어야했지만 수많은 커플들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면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서늘한 손이 차갑게 식었을 때는, 한참을 걸어 유흥가가 밀집한 골목이었다. 나는 쓰게 웃어버렸다. 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생각없이 오는 곳이 고작 이런 곳이냐. 녀석의 다른 한 손은 바지주머니에 꽂혀있었지만, 내게 내주고 있던 화인이 놈의 다른 한손은 시릴 만큼 차가웠다. 이상한 데서 미련한 놈. 이렇게 차가우면 손을 빼면 될 걸. 나는 그제야 녀석의 손을 놓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 어딘가에 그게 있을텐데. “잠깐 기다려.” 한쪽 눈썹을 불만스럽게 들어올리는 녀석을 놓아두고 나는 급히 절뚝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깁스를 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움직이니 혹시 잘못되는 거 아냐, 하고 걱정하면서. 하지만 그보다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이어야 했다. 조금 걸어서 올라가다보니 몸을 떨고 있는 행상이 보였다.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나는 물건이 어지러운 리어카로 가서, 눈을 굴렸다. 한참을 서성거리며 이것저것 골라보다 결국 검은색 목도리를 하나 쥐어들고는 서둘러 녀석에게로 향했다. 손에 든 따뜻한 천의 느낌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처음 하는 선물이다. 이런 싸구려 안한다고 해도, 의미가 있는 거니까. 화인이 놈을 두고왔던 장소까지 와서 막상 보이지 않는 놈을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뒤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 우리는 타이밍이 항상 좋지 못한 것 같다, 권화인. 손에 쥔 털뭉치를 꼭 말아 쥐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화인이 녀석은 그새 어느 바 벽에 기대서 농도 짙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잘빠진 여자와. 내가 있는 자리에선 여자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온몸으로 녀석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매달리다니, 많이도 굴러먹었겠군. 화인이 놈의 검은 눈이 나를 보고는 짙어졌다. 키스가 더욱 깊어진 것과 동시였다. 정작 화인이 놈은 벽에 기댄 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는데 여자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녀석에게 붙였다. 나는 담배가 없는 빈손을 아쉬워하면서 반대쪽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녀석들을 구경했다. 키스에 열중하는 화인이 놈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흐응, 후아, 자기, 진짜 키스 끝내준다. 어때, 나랑 저기 갈래?” 여자가 모텔을 가리키며 숨을 몰아쉬자 화인이 놈은 조금도 여자와 모텔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만을 주시하며 입가를 비틀었다. 틀림없이 여자의 말도 듣고있지 않겠지. 냉정한 새끼. 유혹한 게 어느 쪽이든 어느 정도 호응해준 주제에. “꺼져.” 녀석의 마른 입술이 거칠게 비틀어졌다.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쥔 검은 목도리를 슬쩍 쳐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걸 사길 잘했군. “싱겁군. 그게 뭐냐, 보는 사람 맥 빠지게.” 녀석의 웃음조차 멈춰버린 얼굴이 이렇게 서늘한 것인 줄, 나는 왜 미처 몰랐을까. 코끝을 얼리는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Call the turn 25 아쉽다는 얼굴로 화인이 놈을 힐끗거리던 여자는 결국 녀석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하고 욕설을 중얼거리며 떠났다. 화인이 놈은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두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대단한 여자였다. 호주머니에 손까지 집어넣은 놈과의 키스에 잔뜩 흥분하다니. 자존심도 없나.) 낮게 웃음을 흘려대던 녀석이 순간,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면서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녀석. 고작 두 걸음 만에 뛰어온 녀석이 반동을 실어 주먹을 날렸다. 퍽. 고통은, 없었다. 녀석의 주먹은 귓가의 바로 왼쪽 벽에 닿아있었다. “눈을 감았으면, 가만 안 뒀을 거다. 쿡, 잘했어.” 다가온 녀석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깊지만 아무것도 내보이진 않는다. “.........말해봐. 내가 틀린 건가.” “....................” “....시간은 의미가 없다. 결국은 너를 가졌을 테니까.” “.......................” “.....니가 감히 그 눈으로 다른 것을 보지만 않았다면,” “............” “..날 두려워하게 만드는 일 따위, 할 리가 없지.” 드물게 보는 진지한 눈동자. 조금도 떨리지 않는 녀석의 긴 속눈썹. 자조하듯 비틀리는 붉은 입술. 얼굴에 닿을 듯한 녀석의 서늘한 숨결. “크큭, 말해봐. 내가 틀렸나.” “.........춥다.........” “...말해, 사랑 따위 아니었잖아.” “.......그만 가자, 권화인........” “한비류, 넌 사랑 따위 하는 녀석 아니지. 이거 뭐냐. 복순가. 그러냐.” 유흥가의 붉은 불빛이 녀석의 얼굴에 어른거린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너는. ............의심하고 있는 거다. 내가 잠자코 있는 것에. 흔치않게 흥분한 녀석의 모습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지. 그 녀석을 사랑했다면, 너를 살려뒀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가끔 녀석이 생각나는 정도일 리 없잖아. 다시 눈을 떴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녀석의 얼굴. ...........이것이, 시작일까. “........사랑이라고 한다면...” ...내가 처음으로 주는, 의도한 상처. 너에게라면, 그마저도 아름다울걸. “..........날 놔줄 거냐.” “큭....” 퍽. 퍽퍽퍽. 녀석의 주먹이 내 얼굴 옆 벽을 연속해서 내리쳤다. 귓가에 미지근한 무엇이 튀긴다. 아니, 사실은 뜨거워. 네 녀석의 피. 역시, 소름끼칠 만큼 붉다.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건, 너다. 언제나, 너야. 비틀린 미소를 띄우며 피투성이인 오른손을 벽에 짓누르는 화인이 놈. 고개를 돌려 녀석의 손을 핥았다. 움찔거리는 녀석의 반응이 혀끝으로 느껴진다. 아프냐, 독한 새끼. 그래봤자 눈썹을 조금 꿈틀하는 정도겠지, 너는. ...........하지만, 나는 아프다. 내가 맞을 때보다, 배는 아프다, 씨발아. 혀끝으로 녀석의 상처를 핥다가 놈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색 목도리를 피가 흘러내리는 놈의 주먹에 감았다.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뭐냐.” “선물이다. 늘 춥게하고 다니길래.” “큭...크큭.” 녀석이 낮게 웃는다. 고개를 숙인 덕에 놈의 표정은, 보이질 않는다. “맘에 안드냐.” “........예쁘다....” “......음.” “..........예뻐, 한비류.” 멀쩡한 왼손으로 내 목을 끌어당겨 안는 녀석. 음, 내가 예쁘다는 거냐. 쿵쿵. 녀석에게 안긴 가슴이 비명을 질렀다. 쿵쿵. 말해두지만, 니가 몰아세운 거야. 쿵쿵쿵. ..............새끼, 차라리 나를 때리지. 내가 네 피를 보게는 말아야지. 쿵쿵쿵. ...........억지로라도,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가, 없다. 네 상처가, 내게도 이렇게나 아프니까. “........나다.” “..............” 담배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오랜만의 담배 맛은, 참 쓰다. “..........시간 끌지 마, 다 된 거 알아.” “..........씨발...” 욕설을 주워 삼키는 충두놈 목소리가 핸드폰을 울렸다. 다 됐으리란 거, 알고 있었다. 사실, 시간을 끈 건, 나다. “..........내일.......” “.......씹, 한비류. 조금만 더......” “.....안돼.” “...씨발, 너 진짜..!!” “...........녀석이, 저질러 버렸다.” “.........!!!” “...........주먹에 금이 갔다.” “.........미친.....” 이를 가는 충두 놈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음, 너도 울고싶은 거냐. 아니면, 나만 그런가. “........씹, 끊어. 내일 갈게.” 뚝. 허무하게 끊긴 핸드폰을 그대로 귀에 대고 나는 담배만 빨았다. -헤어지는 사람한테 주는 선물이, 목도리래. 언젠가 사기연이, 그랬다. 나는 웃음을 흘렸다. 아아, 괜한 생각을. -만약 우리가 헤어지면, 나 목도리 하나 선물해줄래...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얼굴을 붉히고 조금 슬픈 듯이 녀석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건, 혼자 남아서도 따뜻하라는 의미 같은 거야. 정말, 좋아했다는......그런 뜻이래. ............용서해 줄거냐, 너는. 왜, 다시 날 찾는 거냐. 행여나 용서를 생각지는 말아라. ..............아마도 나는, 그때도 목도리 사주겠다는 말은, 안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나는, 너보다 화인이 놈이 걱정되서 죽을 것 같으니까. ..............절대로, 바보같은 이유로 날, 찾는 것이 아니길. ..........조만간에 한번 보게 되겠지, 사기연. 아니면, 영영 못 보게 되거나. “.......정말 죽고 싶은 가 보군. 담배는 어디서 난거냐.” 병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화인이 놈이 중얼거린다. 붕대로 감겨진 녀석의 손에 시선을 주면서 나는 잠자코 고개만 저었다. 창틀에 앉아서, 이제야 네놈이 보던 창밖을 내려보면서, 녀석이 뱉어내던 담배연기를, 이제는 내가 따라 한다. 그런데 네놈이 보던 게 아래인지 위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늘이냐, 땅이냐. 아니면, 그저 허공인가. “감기 들겠다, 그만 나와라.” 후, 어울리지 않게 걱정하는 척은.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내면서 제일 바깥쪽의 창을 닫았다. !!!!!!!!!!!!!!! 씹. “...........한비류.” 재촉하듯 부르는 화인이 놈. 씨발, 개새끼. 제일 바깥 유리창으로, 뒤쪽의 화인이 놈의 모습이 비췄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이 창을 모두 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침대에서 녀석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른한 표정으로 담배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보고있던 게, ................고작 나였냐, 미련한 새끼. Call the turn 26 이튿날은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화인이 놈이 학교에 가자, 나는 창틀에 앉아서 딱딱한 다리 깁스만 두드렸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덮친다. 그랬다, 화인이 놈은 겨울바람 같았다. “.......곧, 봄이 올거다.” 언제 들어왔는지 충두 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날이 서린 목소리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답지 않게 굴지 말고 얼른 준비해. 시간 없어.” 물론, 알아. 그런데 지금 이 바람, 꼭 녀석 같지 않냐. 한없이 차가운 주제에, 어김없이 덮쳐 오잖냐. “...씹, 한비류!” “...기왕이면 따뜻한 곳이 좋겠는데.” 차가운 바람이 불때마다 놈이 생각나면, 곤란하거든. “........씨발, 잠자코 가란 데로 가!! 미친 자식, 지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거야?” 충두 놈의 욕설에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봤다. 담배를 질겅질겅 신경질적으로 씹으면서 눈썹을 찌푸린다. “.....작별인사는, 못했다만....” “...미친, 아주 꼴값을 떨어요. 얼른 깁스나 떼고 와, 새꺄!! 아님 내가 망치로 부서주랴?!!” .........반갑구나, 그 욕. 서둘러 병실을 나서면서 녀석이 새 담배를 꺼내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말보로라니, 독하다고 안 피던 놈이. 아직 뼈가 다 붙지 않았다고 수선을 떨어대던 의사는, 충두 놈이 험악하게 멱살을 잡아올리자 하얗게 질려서는 위잉거리는 절단기를 가지고 왔다. 나는 허헛, 하고 웃으며 나름대로 의사에게 친근하게 웃어보였는데 충두 놈이 뒷통수를 내려치는 바람에 제대로 지어졌을지는 의문이다. 뼈가 다 붙지는 않았다지만, 깁스를 풀었는데도 그다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느릿하게 진료실을 나섰다. 서두르지 않는다고 충두 놈이 뒤에서 걷어찼지만, 나는 슬쩍 엉덩이를 문지르기만 했다. 묘하게 포악해진 충두 놈이었다. 병실로 다시 돌아와서 환자복을 갈아입으려니 충두놈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나는 잠자코 검은 색 니트를 꿰어 입었다. “........미국이다. 어디든 조용히 짱박혀 살아, 새끼야.” “........난 영어 못하는데.” “씨발, 니가 뭐 딴말은 할줄 알아?!! 그래도 영어면 인사는 할 줄 알거 아냐?!!” .......‘Hi’나 ‘Hello’를 말하는 거라면, 물론 안다만.. “.......나, 코쟁이 놈들한테 인사하고 다녀야 되냐?” “아, 미친, 그럼 거기서도 까고 다니려고?!!” “....뭐, 시비걸면.” “..................코부터 날려버려라.” 녀석이 진지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되려 흠칫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충두야. 착하게 살란다. “씹, 한비류. 이제부턴 죽을 듯이 도망 다녀야 되는 거, 아냐?” “.........곧 잊겠지.” “미친 놈. 잘도 잊겠다, 그 머리 좋은 놈이!! 그놈 지랄할 거 생각하면 머리가 다 아픈데.” 꿈지럭거리면서 짐을 챙기려니 녀석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움켜쥔 손가락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가, “........너 염색 다시 해야겠다.” “으아악!! 씨발, 미친 새끼!! 죽을래!!!” 하지만 검은 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충두 놈은 유난히 자신의 머리나 피어싱에 대해 말하는 데 예민했다. 이상한 놈. “야, 아직 시간 있잖아.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씨발아!!” “....평생 뜨는 건데, 나도 인사할 사람 많다.” “지랄. 침대에서 굴러대던 년들밖에 없는 놈이.” “.........계원이는...” “.....그 놈 알면 너 진짜 죽는다. 잠자코 떠나, 새끼야.” 아아, 그렇지. 물론, 그런데........그 녀석도, 친구랍시고 걱정된다. “........그 녀석, 잘 부탁한다.” “......누굴 말하는 거야. 계원이 새끼, 아니면 화인이 놈?” “..........둘 다.” “아주 오지랖 넓어서 가랑이 찢어지겠네. 화인이 새끼는 몰라도 계원이 놈은 왜 걱정 하냐?” 빈 담배갑을 구겨버리는 충두 놈. 나는 그저 몇 벌의 옷으로 채워진 가방을 닫으며 쓰게 웃었다. “너도, 걱정된다.” “......미친 놈.” 그래, 너도 걱정된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 놈. 든 것 없이 가벼운 가방을 들면서 자리에서 녀석을 마주봤다. “............씨발, 벌써 가냐? 독한 새끼.” “음, 잘 살아라.” “쳇, 다시 보지 말자, 새끼야.” 녀석이 툴툴댄다. 나는 또 슬핏 웃었다. 걸음을 옮겼다. 충두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늘한 손잡이를 돌릴 때에야, 녀석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 걸리면, 죽는 거 아는 거냐?” “.........알아.” “.............그때는 친구도 아닐 거란 것도, 아는 거지, 씹새야.” “.........음..” “쳇, 태평양 앞바다에 빠져 죽을 새끼. 잘 가라.” 문을 열었다. 나는 다시 인사하지 않았다. 대신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벗어났다. 언젠가, 네게도 고맙다고 할 날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그렇지? 붉은 벽돌의 단독주택이었다. 담장은 시린 바람에 말라붙은 넝쿨이 떨어질 듯 달랑거렸다. 가지를 드러낸 키 큰 나무는, 틀림없이 봄이 되면 초록색 새순을 틔울 것이다. 나는 파랗게 페인트칠된 대문에 다가서며 머뭇거렸다. 처음 온 녀석의 집은, 생각처럼 아름다웠다. 보이지는 않지만 앞마당엔 들장미를 키울 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비록, 겨울은 집의 아름다움을 반도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있었지만. 비행기 시간을 가늠하면서 나는 장미꽃무늬의 초인종을 눌렀다. 조용하고 낮설지 않은 음이 흘러나와서 나는 조금 움찔했다. 이름을 밝히자 가정부로 보이는 여자가 맞아주었다. 나는 조심스레 여자를 따라 녀석의 방으로 향하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문 앞에서 막상 문을 열지 못하고 나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가방을 맡기고는 작게 노크했다. 여자는 뒤에서 돌아섰다.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긴장하는 건, 나답지 않았다. 불도 켜지지 않은 방안은 그러나 비춰드는 햇빛으로 상당히 밝았다. 방의 오른쪽에 위치한 침대에, 녀석이 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사기연..........”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를 돌아보지 조차 않았다. 창은, 여기에도 열려있었다. 녀석은 침대 머릿맡에 작게 나 있는 창에 시선을 향하고는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방안에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류야.....” “어.” 잠자코 누워만 있던 사기연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여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녀석은, 아파보였다. “............널, 증오해.” “........그래.” 예상하던 말이었다. 그보다도 녀석의 가냘픈 목소리가 걸렸다. 말 사이사이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이 잔뜩 쉬어있다는 것은, 나를 더욱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굳어오는 얼굴을 쓸었다.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방안을 온통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널, 증.......오해.” “..............그래.” 녀석은 이번에도 중얼거렸다. 녀석의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내게도 보였다. 내가 볼 수 있는 녀석의 옆모습엔, 강하지 않은 햇살이 녀석의 창백한 안색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있었다. “..한비류!! 널 증오한다고!! ‘그래’가 아니야!! 널 죽이고 싶어!! 죽이고 싶다고!!!” 사기연은 갑작스레 흥분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격한 움직임으로 홱 소리가 날 만큼 나를 바라보면서, 녀석은 울었다. 나는 그저 잠자코 서있었다. 내게는, 녀석을 위로할 힘이 없었다. “...........흑.....비류야...........” “.................” “.........비류야......비류야............” “............그래..” “..........보고.....싶었어.......정말.........보고 싶었어.......” 녀석은 마지막에 봤던 때처럼 울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데도, 깜박거리지 않는 눈동자가, 나는 슬프면서도 부담스러웠다. 그것은, 내 죄책감을 들추니까. “.........비류야.....난 널 증오하고........또.......사랑....하고.........그리고.....그리고.........” “.........기연아.......” “...........왜.......지금 온 거야.............왜........이제서야................나는....지환이가 너는 안올거라고 해도, 계속 기다렸어.......” 지환? 아아, 현주연에게 연락한 친구가...... “............비류야..........니가 안오니까............영영 권화인에게 뺏겨버린다고 생각하니까, 나 너무 두려워서.............그래서.......알지.....응........비류야.......넌 알거야......” 녀석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기연은, 창백한 안색에 안도한 기색을 띄었다. 퉁퉁 부은 눈은, 사실 더 이상 예쁘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나는, 대체 이곳에 무엇하러 왔나. 내가 와봤자, 무엇이 달라지는가. 가령, 감당하기 싫은 죄책감이라도 덜어보려고? 백지장처럼 하얗다, 녀석의 얼굴은. 많이 말라있었지만, 그래도 창백할 정도로 하얘서, 언젠가 녀석의 아름답던 모습보다도 더 안쓰러웠다. “.......이리로 와봐......비류야.......” 녀석이 나뭇가지처럼 마른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잠자코 녀석의 침대에 다가서며 가슴이 묵직해졌다. 언제나, 먼저 팔을 뻗는 것은 너였다. “.......비류야...........사랑해..............아니.....” “.......................그래.........” “.......넌 ‘그래’밖에 몰라.......언제나 내가 물으면 그랬어......‘그래’라고......” 사기연의 뼈만 앙상한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나는 그저 서서 녀석이 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기연은 얼굴을 내 배에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너한테서 바람 냄새가 나..........묻어왔나봐.........” “.....음......” “.......킥킥.........바람 냄새야.......킥킥킥.........바람 냄새...............”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문질러대던 녀석이 키득거렸다. 나는 한없이 녀석이 안쓰러워져서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란스러운 것뿐이라면 좋겠지만, 정신을 놓진 않겠지, 응. “............이거............권화인 냄새지.........” 녀석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아졌다. 나는 왠지 섬뜩해져서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래........용서해줄게.........비류야....비류야..........사랑해........” 확실히 사기연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울음과도 같은 한숨이 나왔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어쩌면 좋겠냐. “.........곧, 괜찮을 거야..........비류야.....이제 너는 온전히 내거일 수 있어.........” “.........기연아.........” “..........음.......지환이.........일 잘해............그런 거..........” 녀석이 강아지처럼 머리를 내게 비볐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정신과 치료는, 받고 있는 걸까. “.............빵............한방이면........될거야............” .........사기연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Call the turn 27 “무.......슨.........” “........아아......비류야............우린 행복할 거야........응응응.............그래...........우린.....꼭........그럴거야........” “......사........기연.....?” “.......너도 밉지......그치...............권화인이.......밉잖아.......그치....” “..........너도........나를 좋아했는데..........권화인이.......우리를...갈라놨어............하지만....이제 괜찮을 거야.........지환이가.......아....지환이는 날 사랑한대.........” “지..환이? 무슨 소리야, 사기연!!” “.....응.........지환이.....내 소꿉친구.........날 사랑한대..........나는 널 사랑하는데...........그런데 괜찮대.....그래서 내가.....응........지환이는 사격분데........” “........사.....격부?” “...아하하..........걱정마.......나는 널 사랑해.............아하하.......아하하하..” 사기연이 크게 웃어댔다. 몸이, 굳어버렸다. 대체, 무슨 소리야!! ..설..마....설마...... “.......지환이란 애한테 권화인을 쏘라고 한거야?!!” “.......흑흑.........비류야.....미안...미안해..............으흐흑.......지환이가....한번만......한번만 자달라길래............정말 한번이었어...........” “사..기연!!” “.....화 난거야.......흑흑........비류야.......한번만 자주면........권화인 죽여주겠다고......지환이가.....지환이가...............” “........죽........여.......?” “.....킥킥킥........나 거기도 없는데.........섹스했어........킥킥킥.....비류야....우리 할 수 있어.........킥.........우리 할........” 머리가 비어버렸다. 사기연은 울면서 키득거렸다. 검은 니트가 녀석의 눈물로 범벅이었다. 안돼! 순간 몸이 움직였다. 나는 가야했다. 사기연이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녀석의 방을 뛰쳐 나왔다. 뒤에서 사기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러나 내 가슴에선 녀석보다 큰 비명이 울렸다. 그것은 머리가 터질 정도로 울려대고 있었다. 학교로 가야했다. 아니, 수업이 끝났을까. 목표는 어디였을까. 학교에서였을 리는 없을 거다. 달리면서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이마에 땀이 차올랐다. 미처 회복되지 않은 다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쉼 없이 아스팔트를 박차고 달렸다. .........현주연!! 맙소사!! 그녀는 병원을 가르쳐 줬을 거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휘청였다. 그곳은, 최악의 장소였다. 녀석은 창가에 서 있는 것을 즐겼다!! 심장은 울부짖듯이 펄떡거렸다. 빠르게 달리는 얼굴로 바람이 칼처럼 날아왔다. 택시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골목인 데에 이를 갈면서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숨이 막혀왔다. 그것은, 온전한 두려움이었다. -뭐하는 거냐....... 녀석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봤다. 피로 온통 붉은 시야에 화인이 녀석이 들어오자 나는 안도감에 몸이 떨렸다. 나는 이미 온몸이 구타로 퉁퉁 부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크큭, 멋진 얼굴인데... 녀석이 입가를 휘어 웃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놈은, 그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웃음을 짓던 미친 놈이었다. 사실 우리는, 당시 세력간의 충돌이 잦던 성화중학교 일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큭, 누워있는 걸 내려다보는 재미로 굴리긴 했었지만........ -아무대서나 드러눕는 건, 곤란해. 화인이 놈이 서늘하게 웃었다. 놈의 웃음에 되려 움찔한 것은 열댓명은 족히 되던 일진 놈들이었다. 나는 부어터진 눈을 제대로 뜨려 노력했다. ........아니야!! 그건, 4년도 더 전의 일이야!! 씨발, 권화인은 그때처럼 무사할 거야!! 나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거의 넘어질 듯이 무게중심을 앞으로 하고 달렸다. 바닥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혼자 오다니........미쳤군. 당시 성화 중 짱이던 홍수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일진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화인이 놈은 그저 웃었다. 입가에 문 담배가 비틀어졌다.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고 나른하게 고개를 들었다. 교복 호주머니에 끼워 넣은 손은, 빼지도 않은 채였다. 햇살이 녀석의 머리로 쏟아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담배의 끝을 따라 다른 놈들의 시선도 돌았다. 홍수명은 얼굴까지 붉혔다. 나는 혀를 찼다. 맙소사. 뒷걸음치던 녀석들은 수적 열세를 믿고 화인이 놈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퍽.퍽.퍽.퍽.퍽.퍽.퍽.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몸들이 바닥으로 굴러 미미한 진동마저 느껴졌다. 비명 소리도 들렸다. 나는, 그러나 녀석이 무사할 것을 확신했다. 비록, 저 놈들 정도에 널부러진 것에 화인이 놈에게 걷어 채이겠지만. -미치겠군... 가까이 다가온 발소리. 화인이 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떴다. 땀을 매단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화인이 놈은 못마땅한 듯 쓰게 웃었다. -......크큭, 부어터진 얼굴도, 이래서야...... -........후우, 알아서 기어가라. 유감스럽게도, 난 좀 급해져서........ 화인이 놈은, 새 담배를 다시 꺼내 물고는 몸도 못 가누는 나를 내버려둔 채 사라졌다. 처음엔 황당함으로, 그리고 이내 분노로 이어지던 내 감정은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녀석의 등에, 길게 베어진 상처가 멀어졌다. 놈의 말대로, 녀석은 신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뿐. 나는, 왜 눈을 감아버렸던 것일까. -너는 녀석을 이용한 거야. “틀려!” -너는 화인이 놈 감정을 알고 있었어. “말도 안돼!” -한비류, 넌 사기연을 핑계로 도망가려던 것 뿐이야. “그렇지 않아!!”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달렸다. -화인이 놈은, 죽고 말거야! “꺼져버려, 씨발!!” 심장이 화답하듯 거칠게 뛰었다. 숨이 턱에 닿았다. 병원 건물의 윗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Call the turn 28 떨려오기까지 하는 다리는 너무 느렸다. 정신없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치고 뛰었다. 골목을 돌자 누군가의 몸과 부딪쳤다. 뛰어오던 속도대로 바닥에 구르면서 나는 힘겹게 일어섰다.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딜 가는 거지?” ........소..계원!! “....급해 보이는군...” 숨을 헐떡이는 내게 녀석이 낮게 중얼거렸다. 녀석은 교복차림이 아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흑표범 같은 녀석이, 묘하게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헉.....헉.......소계...원.......화인이..헉..” “......................” 화인이 놈의 이름을 듣자마자 녀석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계원이 놈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면처럼 딱딱한 얼굴근육이 경련했다. 녀석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휘둥그레진 눈에 녀석의 슬픈 눈동자가 비쳤다. “......내가, 이럴 거라곤....물론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지만..” 녀석의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숨을 고르며 녀석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녀석의 시선을 나를 향해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뒤쪽,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명의 커다란 덩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다....” 검은 색 양복으로 통일한 덩치들이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계원이 놈의, 조직원이라는 것을 물론 나는 알았다. 심장이, 뛰는 걸 멈췄다. 격렬하게 뛰다가, 죽어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아프게 끼쳐왔다. 소계원은 뒤로 물러서 눈을 내리깔았다. 다소 짧은 녀석의 머리는, 검다. 늘 당당한 녀석이기 때문에 내 키와 비슷한데도 그보다 커보이던 녀석의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검은 색은 언제나 녀석에게 잘 어울렸다. 잘빠진 녀석의 근육질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정장도, 어김없이 녀석다웠다. 그것은, 녀석의 힘과 당당한 만큼이나 그랬다. 소름끼칠 만큼 틈이 없는, 소계원. “........비행기 시간이...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너는, 알고 있었던 거야.... “..........결국, 돌아온 거군.....”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계원...” “............돌아오지 않기를, 정말로 바랬다........” .....정말,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결국, 누구보다 미쳐있는 건......나군........” 녀석이 조금도 웃지 않고 중얼거렸다. 얼굴은, 놀랍도록 창백하다. ......넌, 틀렸어, 소계원. 앞을 가로막은 덩치들은 조금도 안면이 없었다. 소계원이 즐겨 쓰는 인물이라면 나도 웬만큼 알고 있었지만, 다소 험악한 빛을 내뿜는 앞의 인물들은 오래된 기억에도 없었다. ....확실히 하겠다는 거지.... 나는 입가를 쓰게 비틀었다. 멎었던 심장은 다시 배로 빠르게 뛰었다. 사실,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녀석의 오래된 감정 따위! “소계원, 적어도 지금은 비켜. 권화인이.......” 휙.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굉장한 속도로 날아오는 커다란 주먹을 상체를 굽혀 피했다. 양복 단추가 뜯어질 정도로 크게 몸을 놀려대기 시작한 덩치들이 나를 에워쌌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다리가 지잉 울렸다. “헉..씨발, 소..계원!! 녀석은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연신 날아오는 주먹들을 피하면서 소리 질렀다. 이럴 때가 아니야!! 권화인이 죽는다고!!! “.......화인이 자식...........주먹은 어떻게 된 거냐.....” 녀석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갑작스런 녀석의 말에 멈칫하다 세게 주먹을 맞고 뒤로 물러났다. 덩치들은, 다시 거리를 좁혀오기 위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언젠가, 혼자서 널 구하러 갔을 때도........상처를 입어서 왔지.........” 아아, 그래. 갑작스레 네 잘난 인내심이 바닥난 이유, 그거겠지. 녀석의 상처. 씨발! “.........헉.........권화인 자식..헉.....죽는다.........” “.....아니, 니가 이대로 녀석에게 가면............그렇겠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녀석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굳은 입매가, 부자연스럽다. 덩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놈의 발차기를 몸을 빼 피한 후 놈의 턱을 올려찼다. 제대로 먹혔는지 들어간 발조차 얼얼하다. .........나는.........떠나려고 했다........ 등 뒤에서 날리는 주먹을 어깨에 비껴 맞은 뒤 돌려차기로 날려버렸다. 움직임이 커 쉽게 지치겠지만, 빨리 처리하려면 발차기가 났다. 내어준 어깨가 뻐근하게 아프다. ......네놈이 이렇게 날 화나게만 하지 않았어도.......어쨌든 결국엔 떠났을 거다!! 빠른 속도로 앞의 놈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져나가는 주먹과 시간차를 두고 뿜어져 나오는 피. 남은 것은, 둘. ......난 성질 좋은 놈이 아냐, 씨발! 칼을 들이대는 놈은.........친구로 안쳐!! 퍽. 얼굴에 맞은 주먹에 몸이 휘청거렸다. 고개를 바로하며 상대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워낙 덩치의 녀석이라 걷어찬 나도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이제 하나. 입안에 비릿하게 피 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내가 널 믿은 것은........어떤 일이 있어도..화인이 놈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 들어오는 주먹 쥔 팔을 잡아채 빠른 속도로 꺾어버렸다. 소름끼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덩치는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상당히 단련된 놈이었다. 내가 녀석의 부러진 팔을 놓아줄 때까지 덩치는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화인이 자식.........잘도 가르쳤군......” 자세를 잡으며 소계원이 중얼거렸다. 나는 숨을 고르며 녀석을 노려봤다. ......소계원, 용서할 수 없는 건, 권화인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너다. “......헉...나중에 죽인다. 절대로.” “.....지금 죽여....” 녀석이 서글픈 듯 웃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지금 와서 니놈이 그런 표정 지어봤자, “.....헉....권화인이 총에...헉.... 맞을 거다, 씨발!” 커다랗게 외치며 나는 다시 달려 나갔다. 이리저리 얻어터진 몸은 축 늘어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본 소계원의 충격 받은 표정 따위, 어차피 난 착한 놈이 아니야! 권화인이 정말 죽어버린다면, “씹,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죽여주겠어, 사기연과 소계원!!!! 어느새 병원 정문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탕. ....총 소리가, 찢어발길 듯이 울려 퍼졌다............ Call the turn 29 심장이 부서지는 느낌. 머리가 텅 비는 느낌.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 다리가 멈춰버렸다. 내 병실이었던, 여전히 열린 창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손끝이 떨려왔다. 공기가 비틀어지는 것, 같다. ....하하, 말도 안돼. 총이라니..총이라니...... 이렇게 환한 대낮에 총을 쏴대는 미친 놈이라니.. 여긴 미국이 아니라구....... 갑작스런 총소리에 병원에서 비명이 울렸다. 째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소란스러워지는 현관. 나는 웃고 있었다. 정신없이 땀을 흘리면서.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돼....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화인이 놈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 우리 집에 녀석이 온 날이었는데, 그때엔 충두 놈과 계원이 놈과는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인이 놈 혼자만 왔었다. .....그게.......그러니까....아아....8살이었던가. 내 생일이었다. 나는 당시 못 말릴 정도로 내성적인 탓에 친구도 하나 없었는데 왠지 그 생일은 혼자 보내기 싫어서, 녀석을 초대했었다. 화인이 놈은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정말 더럽게 말 수 없는 놈이네’하고 나는 투덜댔었지. 하지만 속으론 괜히 기뻐서 뭐하고 재밌게 놀지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집에는 어머니가 웬일로 사촌 녀석들을 불러 놓고 파티분위기를 만들어 놨었다. 나야 어차피 매년 그랬듯이 초대할 친구도 없으리란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겠지만, 내 사촌 녀석들은 지독히도 못된 녀석들이었다. 학교에서 당하는 괴롭힘에 비하면, 역시 대단치 않은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생일에 당해도 좋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나에겐, 처음 친구를 초대한 생일이란 꽤나 의미있게 여겨졌으니까. 정작 화인이 녀석은 역시 무표정으로 별 상관치 않는 듯 했지만,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숙제를 도와주는 녀석이 고마워서 얼마 전부터 만든 모형을 주고 싶었는데 정작 모형이 있는 내 방은 이미 사촌 녀석들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 한 놈이 내 비행기 모형을 위험천만한 손으로 만지기 시작한 데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녀석들에게서 모형을 빼앗으려다가 뒤로 밀려 넘어졌는데, 나를 밀어버린 녀석의 손에서 모형역시 부서져버렸다. 나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맞는 데는 꽤나 익숙했다. 그리고 그닥 세게 밀쳐진 것도 아닌 데에 울어버릴 만큼 나약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인이 놈에게 줄 모형이 부서져버린 것은 정말 슬펐다. 나는 없는 손재주로 몇날밤을 그것에 홀딱 새버렸기 때문이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화인이 놈은, 얼굴을 심하게 궂히더니 사촌 놈들을 패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화인이 놈은 항상 내가 우는 것에는 이상하리만치 예민했다. 평소엔 맞는 것도 구경만 하던 녀석이.) 결국 사촌들은 울면서 방을 나가버렸고, 화인이 놈은 얼굴이 온통 붉어진 채로 숨을 몰아쉬면서 울다가 놀래서 눈물이 말라버린 내 앞에 와 섰다. 화인이 놈은 뭔가를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달싹 하더니 결국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았다. 그 손의 느낌은, 왠지 따뜻했다. 녀석이 힘주어서 눈물을 닦아내던 통에, 눈두덩이 빨갛게 되어버렸지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히죽 히죽 웃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우는 건가. 천만에. 나는 웃었다. 바로 앞의 응급실에 난데없는 소란이 보였다. 여자들의 째지는 비명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거렸다. 온몸이 다시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느릿하게 뛰었다. 아니, 사실은...........뛰지 않았다. -봐, 결국 넌 화인이 놈을 잃어버렸어. 머릿속에서 비웃는 듯한 말이 울렸다. 나는 인정했다. 음, 나는 녀석을 잃어버렸어. -하긴, 놈은 지긋지긋했어. 미친놈이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호응했다. 맞아, 그 놈은 미친놈이었어. -그런데 넌 왜 우는 거야. 아니, 난 웃고 있어. -너도 미쳤어. 넌 지금 울고있다구. 당연하잖아. 나도 그놈 친구인걸. 내가 미친 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야. -녀석을 사랑했니? 머릿속의 말은 이제 현주연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봐, 내 머릿속에서까지 충고하려는 건가. -녀석을 사랑했지? 큭, 내가 짱구냐. 사랑도 모르게. 그런 거 아냐, 그 놈은. -그런데 왜 날 버리고 간거야!! 사기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음, 왜 그랬을까. 음, 나는 왜 이렇게 죽을 것 같을까.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쳐다봤다. 시멘트를 짙게 물들이는 두개의 자국이 커져간다. 아아, 눈물이 헤퍼졌어. 차가운 한기가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몸이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잃어버렸으니까. “..........한......비류......” 귓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 쿵. “......씨발......큭.........” 쿵. 심장이...........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떨궜던 고개를 힘겹게 들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녀석이, 있었다. “...........뭐하는 거냐......” ........권화인!!! 녀석은 땀투성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땀이 맺혀 있다. 어깨와 가슴께에, 확연한 붉은 피. 그것은 이미 녀석의 팔을 따라 붕대가 감긴 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똑. 녀석의 손끝으로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다. 녀석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휘청. 녀석의 어깨가 흔들리더니 내게로 무너졌다. 나는 황급히 녀석을 받으면서 눈을 깜박였다. 너냐, 권화인. 정말 너냐. “........씨발..........어디 갔었냐........” “........미친 자식.......총 맞은 놈이 어딜 나와!!” 녀석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나는 웃었다. 이번엔, 온전하게. “........씹, 거기 의사!! 얼른 이놈 치료 안해?!!” 뒤에서 어쩔 줄 모르던 의사들을 험악하게 부르니 내 팔을 잡던 녀석의 손이 강하게 죄어 온다. 아팠지만, 웃음이 났다. 너는, 살아 있는 거다. “........떠난다라...........크크큭...” “..........씨발, 얼른 이놈 안옮겨?!!” “......꿈도......꾸지마........한..비류.....” 녀석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평소랑은 다르게, 고통에 의해서. 씹, 수술이나 받으러 가, 새꺄!! 녀석의 어깨의 피가 내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보기에도 심각한 상처지만, 너는 괜찮을 거다. 응급요원들이 들 것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녀석을 눕히는 것을 도우면서 녀석의 손을 잡았다. 꼭 죄어오는 긴 손가락. “.........충두 자식........죽인다고 전해라.......” 실려 가기 전에 낮게 중얼거리는 화인이 놈. 나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씨발, 정충두. 날 용서해라. Call the turn 30 수술은 여섯 시간 동안 이어졌다. 신경이 다쳐서 꽤나 어려운 수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괜찮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 놈은, 강한 놈이니까. 지리한 수술이 끝날 때쯤, 충두 놈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녀석을 맞았다. 하얗게 질린 충두 놈의 얼굴은 놀라웠다. 나는 충두 놈이 계원이에게도 연락했을 것을 알았다. 녀석은, 결국 오지 않았다.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나는 물론 충분히 예상했다. 의사가 피곤한 얼굴로 수술이 성공했음을 알리고 가자, 나와 충두는 긴장이 풀려 정작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 녀석을 꼬집을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걱정을 시키다니, 얄밉지 않은가. 하지만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아 나중에는 정말 걱정이 될 정도가 되어서야 화인이 놈의 긴 속눈썹이 움직였다. 마주보는 검은 눈동자를 보고서, 나는 왠지 깊이 감동해버렸다. 아, 진짜 이쁘다. 화인이 놈은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마주보며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씨발, 누가 그렇게 보면 쪼냐. “.....내가...맞고 다니지 말라고.........” “씹, 너나 총 맞고 다니지 마.”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씨발, 이게 따지고 보면 누구 때문인데!! “......크큭......총이라........제법이야.....” 화인이 놈이 음산하게 웃었다. 나는 굉장히 오싹해졌다. “...권화인, 그 놈 그냥 잊어라......” 내가 입을 열자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냐. “나를 봐서, 뒤는 캐지마.......” 사기연에게...........상처 준 건, 너와 나니까. “...그 모든 게 그냥 가능할 것 같나.” 녀석의 입가에 확연한 비웃음. 나는 익숙하게 올린 입꼬리를 살짝 핥았다. 녀석의 눈이 커진다. “....어떠냐.” “.......음, 약한데.” “......좀 더 생각해 봐.” 나는 낮게 키득대며 입을 맞췄다. 뒤에서 떨어져있던 충두 놈이 의자를 발로 차고 나가버렸다. 음, 아무래도 얼마간 갈구겠다. 녀석의 혀가 부드럽게 감긴다. 나는 살짝 입을 맞댔다가 떼었다. 녀석이 만족스레 웃었다. 눈을 예쁘게 휘면서. “.......그런데 누구한테 맞은 거지.” 으아, 집요한 새끼!! 물론, 나는 하루 종일 누워있는 화인이 놈의 입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맞닿은 녀석의 입술이 웃을수록 키스는 깊어졌다. 흠, 지금이라면 내가 깔 수도 있을 것 같은데. Call the turn 외전 1 수갑과 커플링 “한 가지만 묻자. 그 동안 뭐하고 다닌 거냐.” 아버지가 검은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버지의 안경은 언제나 저렇듯 볼품없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충두 놈은 ‘김..김구 선생이다앗!’하고 정말로 감탄을 했을 정도로.(녀석은 어울리지 않게도 김구 선생을 존경했다나.)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내온 녹차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 녹차를 싫어했다. “언제나 좋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다.”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아버지가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거의 입도 대지 않은 녹차를 내려놓으면서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슬슬 본론이 나올 때가 됐지. “유학을 가라.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교수 자식이 삼류 대 턱걸이하는 것보단 낫겠지.” 물론 어머니는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엷은 녹차향이 풍겼다. 나는 언제나 녹차향이 질색이었다. 검게 페인트 칠 된 철제 대문을 느리게 밀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맙소사, 죽어라고 쪼아대는 군. 끼익, 거리며 마저 열린 문 앞에 검은 그림자가 길다. “여어, 소계원.” 돌아보지 않는 녀석의 옆모습은, 얼음 조각상 같다. “.....좋아 보이는군.” “아아, 그래?” 나는 질질 끌리는 다리를 슬쩍 들어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계원이 놈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내 다리를 주시하더니 눈을 돌려버렸다. 검은 정장마이를 뒤지면서 작게 욕설을 내뱉는 계원이 놈. 나는 담배 갑을 통째로 던져주면서 비스듬히 담벼락에 기댔다. 막상 담배를 받은 녀석은 쓰게 웃었다. 마른 녀석의 얼굴은 더욱 거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녹차 향.....인가..” “....개보다 낫구나, 너.” 나는 킬킬거리며 녀석의 딱딱한 얼굴을 살폈다. 돌아왔군, 개자식. 며칠 새 헐렁해진 녀석의 검은 정장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더 이상 나는 녀석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만족했다. 한번만 더 표정을 내보이면 죽도록 밟아주겠노라고. .......녀석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후회한다면....” “씨발 새끼, 안 믿어.” “....후, 꽤나 믿음을 잃었군, 나도.” 녀석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후회한다.” 녀석이 돌아섰다. 나는 마저 킥킥댔다. 물론, 너는 죽도록 후회했을 거다. 차가운 바람이 멀어져가는 녀석의 검은 등을 쓸었다. “.......한비류입니다.” 덜컹. 2m는 족히 넘을 듯한 철제문이 둔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인터폰에 말을 하던 자세 그대로, 잠시 머뭇거렸다. 화인이 녀석의 집은, 내게는 아직 낯설다. “.......한비류군.” 물론, 이 사람이 그중 제일이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날렵한 미형의 선을 가진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말했다. 긴 장발을 뒤로 묶은 이 남자는, 말하자면 지금으로선 제일 꺼림직한 상대. 화인이 놈 형님이시다, 제길. “안녕하십니까.” “......글쎄, 동생 놈이 호모가 된 일을 빼면, 그럭저럭.” 제기랄. 뭐냐고, 저 순진한 놈 꼬여낸 몹쓸 년 보는 표정은! 분명히 나는 피해자라고!! 나는 수만 가지의 분노를 삼키면서 한숨을 쉬었다. 승인 형님은 조각 같은 얼굴을 조금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속궁합은 잘 맞던가, 한비류군?” “......동생분이 꽤나 앙탈이 심해서요.” 순간 창백해지는 승인 형님. 크하핫. 입술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하다니, 저 냉혈 독설가가! “그리고 아무리 저라도 총 맞은 놈을 상대로 무리하게 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녀...석이................깔, 깔....린........”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승인 형님을 뒤로하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이런 장면에선 승리하고 돌아온 군대의 행진곡이라도 틀어야하는데. “물론, 무리라면 오히려 계속하고 있었는데.” “!!” “더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니, 기쁘군.” 화인이 놈이 현관에 기대서서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제기랄, 이 놈은 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 거지? “장난도 작작해, 새끼야. 승인 형님 진짜 마음먹으면 넌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 씨발아!” 화인이 녀석 뒤에서 비죽이 고개를 내밀며 충두 놈이 외쳤다. 화인이 놈이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충두를 내려다봤다. “.....누가 감히 건드린다는 거지.” “.........그야, 한둘이겠냐고.” 화인이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생각할 때면 늘 저런 표정을 짓곤 하는 녀석이지만, 지금은 통과.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피곤하단 말이다. “미친놈들.” 나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현관을 들어섰다. 화인이 녀석의 시선이 내 아직도 덜 나은 다리에 향했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들지 않고 녀석의 어마어마한 거실에 놓인 화려한 가죽 소파 위로 누워버렸다. “충두야, 넌 여기서 뭐하냐?” “씨발, 귀찮은 뒷마무리하러 왔다.” 예쁜 -아직도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 놀랍지만-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충두의 입술에 검붉은 구멍이 움직였다. 맙소사, 이 새끼, 피어싱을 빼놓다니!! “으악, 정충두!! 너 적어도 입에 피어싱은 꼭 하라고 그랬지!!” “미친 새끼, 암튼 별 요상을 다떨어요.” “마..말하지마!! 제기랄, 그 구멍이 움직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줄 알아?!!” 충두 놈이 화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녀석의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주먹에서 뿌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씹, 너 뭔가 할 말....없냐?” 위협적으로 낮게 들리는 충두 놈의 목소리라니... 이 새끼, 진짜 화났다!! “.......?” “미친!! 이 새끼는 왜 맨날 이 지랄이야?! 너 오늘.....!!” “.......거기까지, 정충두.” 흥분한 충두의 말을 막은 것은 아직 현관문에 기대서 어느새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화인이 자식. 나는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저놈에게 끌려 살 거다, 씨발 놈아.” “......얼마든지.” 화인이 놈은 입술 끝에 문 장초를 빙글 돌리면서 내가 누워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충두 놈은 심술궂게 내게 입술 양쪽을 잡아당겨 구멍을 늘려 보였다. ...빌어먹을. “........경고를 하자면, 아무대서나 눕는 버릇을 고치는 게 좋을 거다.” 화인이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다가 내 등과 다리에 팔을 끼워 넣어 나를 들어올렸다. 허거, 이 자식, 내 몸무게가 몇인데!! “.....권화인, 씨발, 내....내려놔.......”<-부들부들 “걱정마. 니가 걱정해야 하는 건 떨어질 염려는 아니니까.” 화인이 녀석의 입술이 큭큭 거리며 낮은 미소를 흘렸다. 나는 녀석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서둘러 충두 놈을 찾았다. .........녀석은 아직도 입술구멍을 늘리고 있었다....... 으아아악<-스크림 털썩. 나를 2층의 자신의 침대에 던져놓은 화인이 녀석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나로 말하자면, 카사노바로 몇 해를 살아온 놈인데 지금의 분위기를 모르겠는가. 더구나 스스로도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요즘(내가 욕구불만에 시달려본 게 얼마만인가!), 제 발로 찾아온 기회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총 맞은 몸으로 무리하지 마라......” “.......쿡, 떨지 말라고.” 문제는, 제길! 어째서 총 맞은 놈이 나보다 회복이 빠른 거냐고!! 이래선 자리 탄환에 성공할 수가...... 화인이 자식이 내 배로 올라타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상황을 모면할 궁리를 했다. “...큭큭,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한테도 들리지만, 이곳에서 걸어 나갈 확률은 없는데.” 녀석의 입술이 말을 끝내자마자 부딪쳐왔다. 여전히 부드럽고 서늘한 입술. 하지만 뜨겁게 들어오는 혀. 제기랄, 이 놈의 키스는 중독성이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녀석의 혀를 감아올렸다. 체력으로 밀리면 태크닉으로 자리를 탈환해주지! 화인이 녀석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바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가늘게 웃음짓고 있는 화인이 놈의 예쁜-제기랄- 눈을 마주봤다. 이 성질 급한 놈, 벌써 바지를 벗겨서 어쩌려고!! “읍읍...브브브....!!”(해석 불가능) 녀석의 손이 내 추리닝 바지를 잡아 내리자 -제기랄, 정조대도 시원찮을 판에 고무줄 바지를 입고 이놈을 만나러 오다니!- 서늘한 공기가 다리에 닿았다. 나는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목구멍까지 닿아오려는 녀석의 혀를 깨물어버렸다. 화인이 놈은 입술을 떼어내고는 다소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녀석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잡았다고 생각했지........제기랄....” “..........?” “.........하지만 영원히 내 것은 되주지 않겠다는 건가......” 녀석의 긴 속눈썹이 내 이마에 닿을 듯 깜박였다. 나는 녀석의 말뜻을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좋아, 어쨌든......지금 필요한 건 네 몸이니까.” 화인이 녀석이 잡아 뜯듯이 내 입술을 물어왔다. 녀석의 손이 더욱 거칠게 내 상의를 잡아채며 브리프마저 벗겨냈다. 나는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녀석이 내게 다시 이럴 이유는, 없었다. 화인이 녀석의 애무는 거칠었다. 내 가슴을 쓸며 핥으며, 마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한 급한 애무. 하지만 나는 조금도 녀석을 밀어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이미 받아들였던 녀석을, 이 아름다운 녀석을........대체 어떻게 다시 밀어낼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녀석의 청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화인이 녀석의 몸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리스 조각상과 같은 녀석의 몸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대리석조각처럼 희고, 차가운 녀석의 몸을 이번에는 내가 감탄 섞인 시선으로 완전히 감상할 때까지. 화인이 녀석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푸.......제기랄........한비류......” 나는 대답대신 녀석의 눈에 고개를 들어 키스했다. 녀석의 붉은 입 꼬리가 올라간 것이 보였다. 절대 제대로는 웃지 못하는 녀석. 녀석의 서늘한 몸이 내 몸에 닿자 작게 한기가 들었다. 감각적이고 서늘한 애무는, 점차 나의 흥분을 높이고 있었다. 화인이 녀석은 언젠가도 그랬듯이 감질 나는 애무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녀석의 페니스를 손으로 쓸며 녀석을 재촉하고 있었다. 제기랄, 녀석의 가뜩이나 큰 것이 더욱 커지게 만들다니!! 화인이 녀석의 혀가 내 목덜미를 핥으며 내 다리를 들어올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시 콘돔 없이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쾌락 섞인 신음과 함께 쉽게 포기했다. 빌어먹을, 다음엔 내가 꼭 준비해야지. 녀석의 페니스가 내 애널에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제기랄, 두 번째지만 마찬가지로 아팠다. 나는 역시 아래로 깔릴 운명이 아니라고!! 하지만 녀석은 멈추지 않고 몸을 흔들었다. 나는 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화인이 녀석의 몸이 닿았다 떨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녀석의 긴 앞머리가 내 가슴을 간질이는 것이, 그리고 점차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이....... 맙소사, 녀석은 천재였다! “헉....헉.........이......새끼.......윽......어디 딴 데.......서 연습하고 온.......헉.....윽.....거 아냐........윽....끅....” “.......한비류......윽........한비류.....” 화인이 녀석은 언제나 마지막엔 내 이름만 불렀다. 나는 신음과 쾌락을 참으며 녀석의 입술에 길게 키스했다.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자식. 나는 녀석에게 비명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정신을 잃었다. ......이 녀석과 있으면 뇌세포가 남아나지 않겠군. “......그러니까...마지막에 저 새끼가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지?” “.........의심 많은 녀석이군.” 잠결에 들리는 목소리는 처음이 충두놈....그 다음이 화인이 놈인 듯..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닫는 데 골몰해서 대화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더구나 화인이 놈의 목소리는 어쩐지 굉장히 즐거워하는 듯한데.... “..........뻥치지 마, 새끼야!! 저 새끼는 저주를 퍼부을 놈이라고!! 더구나 니놈 거칠게 했을 게 뻔한데!! 암튼 내가 계원이 놈 말을 전해준 건.....” .....계원이? 소계원?! “...아아, 예의 ‘유학’건 말인가?” “미친 자식, 그깟 ‘사랑’얘기 들은 거 같고 이렇게 바뀌냐. 아까부터 이를 갈던 게 누군데. 저 새끼, 성질에 ‘사랑’타령은 사정할 때마다 했을 거다. 버릇인지도 모르지.” 으악, 빌어먹을 충두 새끼!! 씹, 내가 그딴 말 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린데!! 난 절대 그딴 말 안한다고!!(미쳤냐, 것도 사내놈한테!!) 갑자기 나를 거칠게 깨우는 화인이 녀석의 손놀림.(눈을 감고도 녀석인 걸 알다니, 나도 미쳤군.) “씨발, 한비류!! 죽여버린다!!” “흥, 그러면 그렇지. 권화인 성질에 무슨 자상공?”<-그런 용어를 어떻게 아는 거냐, 정충두!! 나는 거칠게 깨우는-사실은 고개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잡아 흔드는- 녀석의 손에 못이기는 척 눈을 떴다. “.......한비류!!” 녀석이 흔들어댈 때마다 차마 말 못할 곳이 아프다는 건, 혼자 키득거리고 있을 충두를 생각해 말하지 말자. 제길, 제길, 제길. “........사랑한다, 권화인!!” 맙소사, 미쳤군, 한비류!! 하지만 녀석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데에야, 입이 썩는 것도 아니고. 순간 나와 충두는 분명히 봤다. 권화인이 쩍하고 굳어버리는 걸. 우와, 이 자식이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재밌다!!) 오랜 시간동안 굳었던 화인이 놈이 멍하니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잘 찾아지지 않는지 작게 욕설까지 내뱉는 녀석. “.........녹음기가 없었던 게 아쉽군.” 으악!! 으아, 으아, 으아아아~~~악!!! 나는 봤다. 충두 놈이 뒤에서 아까의 화인이 놈보다 심하게 굳어버리는 것을!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 화인이 놈은.....맙소사,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었다!! “.......개목걸이...정도지만.” “미친 새끼, 개 목걸이에 다이아를 박냐!!” 뒤에서 화인이 놈을 향해 베게를 던져대는 충두 놈. 나는 깨달았다. 오늘부터 이집에서 나갈 수 없으리란 것을. 뒤에 알았지만, 계원이 놈은 내 몸에서 녹차 향을 맡는 것을 무슨 재앙 예보나 되는 듯 받아들였다고 한다. 내가 녹차 싫어하는 건, 우습게도 집에서보다 이 녀석들에게 더 유명하다. “.......그런데, 이거 커플링이지..?” “큭, 결혼반지일까봐?” 화인이 녀석이 드물게 눈을 휘며 웃어보였다. 나는 이것을 금은방에 가져가면 얼마나 받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충두 놈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는 건, 혹시라도 이어질 다음 편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 Fin. -------------------------------------------------------------------------------------- Call the turn 외전 3 사자, 우리를 탈출하다 “씨발, 너 어디야, 이 미친놈아?!!!” 공중전화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혹시 예상가능할지 모르지만 바로 충두 놈이다. 나는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녀석에게 작게 한숨을 쉬어 주었다. 이놈은, 대체 욕이 없으면 대화가 안되는 걸까. “.......충두야, 가출한 놈이 위치 알려주는 거 봤냐?” “으악, 고3이 무슨 가출이야, 씨발아!!” “........고3이기 전에 내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오랜만에 아주 돌아버렸냐, 미친...” 나는 공중전화기가 띠띠거리며 동전이 부족하다는 소음을 내기시작하자 빠르게 다시 말을 이었다. “화인이 놈에게 전해. 내 방에 TV 놓아줄 때까지 안들어 간다고.” “으아아악, 한비류!! 너 정말 화인이놈한테 죽......” 뚜..뚜...... 마침내 동전이 다했는지 전화가 끊기자 나는 난리를 치던 충두 놈을 생각하며 픽 웃었다. 전화박스에서 나오며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태양을 이렇게 받아보는 게 얼마만이냐. 맙소사, 정말 불쌍한 인생이었구나, 한비류. 나는 터덜터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오후 3시. 도심의 거리는 이제 분주해질 시간대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 한편으론 익숙한 풍경. 나는 어쩌면 스스로를 몰랐는지도 모른다. 내가 있을 자리는 평생 유흥가의 뒷골목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꽤 괜찮은 년의 기둥서방자리를 꿰어 찰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쓰게 웃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T를 걸친 스스로의 모습을 지나가던 가게 유리문에 비춰보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소 남자다운 체격의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화인이 놈은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맨날 달려들까. 안기려고 드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생각에 잠겨 거리에 하나, 둘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 발길은 어느새 유흥가 뒷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막한 이곳이 밤새 변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한개피 남은 담배를 꺼내어 물면서 조소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젠가 TV따위와는 다른 엄청난 이유로 녀석을 버리게 될 지도 모르는 거야. 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란 놈은 지치지 않고 사창가를 방황하겠지. 제기랄, 청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놨던 담배가 달랑거리더니만 결국 부러져 버렸다. 이놈도 끊어야지. 부러진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끊어? 대체 왜? 내가 녀석을 버리지 못할 이유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문제는 녀석보다 나인지 모른다. 지금 내가 두려운 건, 맙소사. 녀석을 최악의 방법으로 버리게 될 까봐. 그 인정머리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이, 주저 않고 내 목을 따리라는 것도 상관치 않고. 퍽. 익숙한 소리다. 이런 뒷골목에서는 더욱더. 하지만 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처럼. 퍽퍽퍽. “씨발, 이 새끼, 존나 독해.” “야, 그만 해. 정말 죽어버리면 어쩌냐. 우리 형님 깔인데.” 역겨운 미소를 짓고 있는 놈이 다섯. 걸레처럼 널부러져있는 놈이 하나. 이거야, 화인이 놈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당치않게 눈만 높아졌군. 저 놈들 면상을 오래보고 싶지 않으니. 나는 뒤는 신경도 쓰지 않는 녀석들 중 한 놈을 뒤에서 걷어찼다. 녀석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 뭐야?!!” “이 씹새가!!” 먼저 달려오는 놈의 턱을 세게 올려 찬 뒤, 그 다음 놈의 면상을 갈겨 버리자 남은 녀석들이 멈칫거렸다. 그 틈에 뒤에 놈의 거기를 차버렸다. 같은 남자로서 반칙이긴 하지만, 다섯이서 덤비는 그쪽이 더 문제라구. “으앗!”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놈이 나이프로 내 팔을 길게 그었다. 긴 혈흔을 남기는 팔를 보자, 나는 머리가 싸늘해졌다. 둔해져있던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 녀석의 나이프 잡은 팔을 꺾어 녀석의 배에 힘껏 찔렀다. ‘으아악’하고 새된 비명을 질러대는 녀석에게 남은 놈들도 질렸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적어도 조직에 있다는 놈들이 저리 심약해서야. 아마도 딱깔이나하는 밑에 놈들인 모양. 서둘러 눈치를 살피더니 도망가는 녀석들. 나는 그제껏 널부러져있던 녀석에게 다가갔다. 피로 지저분한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한......비류...?” “........?” “.........나....나.....여..연......수호.....” !! 홱. “.....아.....저기....비..비류야.....” 나는 서둘러 그 녀석을 잡아당겼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충격으로 입이 벌어졌다. “...제기랄......수호형........” 수호형은 내 눈을 피하며 작게 웃었다. 잘 움직여지지도 않을 퉁퉁 부은 입 근육으로. 내게도 첫사랑이라고 한다면 첫사랑이다. 우습지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보내버렸던 사람. 덕분에 남자를 안게 되었지. 그것도, 엄한 놈들만. 금방 잊었지만, 늘 잘되기를 빌었다. 절대로 이런 뒷골목에서 뒹굴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엉덩이에 말라붙은 피를 달고 얻어맞을 사람은 아니었다. “........뭡니까.” 수호형의 부탁으로 형의 작은 자취집에 옮겨놓으며 나는 험악하게 물었다. 수호형은 고통에 얼굴을 작게 찡그리면서 비쩍 마른 손으로 난감한 듯 얼굴을 쓸었다. 그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는 건, 무엇보다 빨리 알았다. “....이민 간 줄 알았는데요.” “.....저기......” “.......사창가에 굴러다니는 겁니까..” “비류야.....” “맙소사, 형 제정신이에요?! 몸을 파는 거냐구요!!” 나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수호형은 두려운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한번도 수호형에게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다. 늘 조마조마하며 안절부절했었다는 걸, 이 사람은 알까. “........너는......화내지마.......” “..........” “너는.....나한테 그럴 수 없어.......” 수호형은 입술을 떨며 말했다. 하지만 결코 울지 않는 모습이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 사람도, 결국 변한 거다. 나는 폐에 검은 가스가 가득 찬 듯,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내 기억을......손상시키지 마.......” 수호형은 작은 새처럼 몸을 웅크렸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세평 남짓한 방은 얼음장처럼 찼다. 수호형이 몸에 감고 있는 이불은,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나는 앉을 자리도 찾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다. “.......빌어먹을.....내게 명령하지 말아요...” “..비류야......” “형은 언제나 명령만 했으니까. 그러고 가버린 주제에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났으니까...” 나는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내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형의 몸에도 이렇게 붉은 피가 있는 줄은 몰랐다. 햇살처럼 투명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어리석은 어린날의 환상. “.......너는.....너는 이런 내가 더럽겠지만........” “..............” “..........그래, 더러운 정액을 받으면서 너를 떠올렸다면.....너는 정말 화나겠지만........” 수호형은 이제는 아주 사라져버릴 것처럼 창백해져서 말했다. 끊길 듯 이어지는 가는 목소리에 나는 멍해졌다. “......그래도 비류야.......나는 정말 꿈인 줄 알았거든......” “니가 나타나서 구해주는 꿈을 매일 꾸고 있어서, 이제는 내가 정말 미쳐버린 줄 알았거든.....” 형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형이 떠나기 전까지 그가 나를 생각했었단 것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보냈다. 이민 가서 행복할 줄 알고 보냈다. “....그래도......저기........그 사람들 위험해......” “닥쳐요. 형 말 다시 들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야!” “......피해야 돼. 금방 여기로 올 거야.” 나는 화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붉고 뜨거운 용암이 머릿속을 태우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정말! 어리석을 정도로 바보 같은 점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다!! “..........전화 있어요?” 수호형은 눈을 둥글게 뜨더니 말라서 갈쿠리 같은 손으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나는 가출한답시고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형이 내민 핸드폰은 전화가 걸릴지 의심스러운 밧데리가 달랑거리는 구형이었다. 밧데리를 누르고 있어야만 전원이 들어왔다. 뚜르르. 나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잠시 심장이 움찔거렸지만, 나를 올려보고있는 수호형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는 침을 삼켰다. “소계원. 딴놈들에게 알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어디야.” 역시 쿨한 녀석. 나는 위치를 전해주면서 녀석이 약속을 지키리란 것을 알았다. 놈은 그런 녀석이었다. “........조금 급할 것 같다.” “.....곧 가지.” 금방 끊겨버리는 핸드폰의 전원을 끄면서 나는 한층 착잡해졌다. 녀석이 내게 같잖은 빚진 심정이라는 거, 그것을 내가 지금 이용한다는 것. 충두 놈이 알면 정말로 화내리라는 것,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거라는 것. “.....비류야, 밖에서 소리가 들렸어. 왔나봐......” 내 소매를 붙드는 작은 손에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걱정이라는 것. 제기랄. 사람의 마음이란 쉽게 돌아선다. 그러니까, 여지껏 그대로인 네가 오히려 문제인 거야, 권화인.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흉흉한 기세를 풍기던 녀석들이 전화 한통을 받고서는 창백하게 질리며 물러갔고, 곧 계원이 놈이 와서 수호형의 문제를 처리하러 갔다. “.......방금 그 사람........나를 노려봤어.......” “..............” 나는 한숨을 쉬면서 수호형을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는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수호형을 향해 곧 돌아온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어느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계원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누구지.” “...........내 첫사랑.” “....미쳤군.” 계원이 놈은 내가 킬킬거리며 말하자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시니컬한 미소마저 보이며 녀석이 말했다. “.......가출했단 소리는 들었다. 녀석이 학교를 뒤엎고 있는 것도 익히 보다 온 거고.” “...............그러냐.” “....충두도 합세하고 있지.” ........미친놈들.(땀) “........위험한 건........아니겠지.” “.....나는 화인이 놈을 좋아한다, 계원아.” “............” 계원이 놈은 잠자코 담벼락에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 녀석이 저런 포즈를 취하면 상대는 말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위압적인 검은 표범 같은 녀석. “.......그런데 다른 감정도 있거든.” “..........!” “.....모르겠다. 시간을 달라고 하면, 날 죽이려 들겠지만.” “...........간단해. 지금 나를 따라나서고 저 안에 녀석은 잊어라. 죽고 싶지 않으면.” 계원이녀석이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녀석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녀석의 포커페이스도, 여전히 화인이놈 얘기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 “.....행위의 주체가 너냐, 화인이냐.” “.......착각하지 마라. 충두는 예외일 것 같나.” 녀석의 목소리가 딱딱하다. 인내심 많은 녀석. 지금이라도 나를 끌고 강제로라도 데려가고 싶은 주제에. “....너희 셋이 달려들면 어디서고 무사하진 못하겠지.” 나는 비웃듯 말했다. 계원이 녀석은 침묵을 지켰다. “.......동정인 것......같다. 그런데 나는 생각해보니 그런 감정도 모르거든.” “..........언제나 느린 녀석.” “....쳇, 사랑이면 어쩌냐.”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 녀석은 언제나 명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뒷처리를 부탁할게.” 나는 녀석이 가리키는 차를 타고 허물어질 듯한 수호형의 집에서 고개를 돌렸다. 계원이 놈이 곧 따라 타자 차가 출발했다. 나는 늘 하던 것 중 최악의 실수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한비류!! 너......!!”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화인이 놈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으르렁 거렸다. 나는 역시 온통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충두 놈도 볼 수 있었는데, 녀석의 붉은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것이 보통 난리를 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팔은.....” 징그러울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한 녀석이라는 것을, 나는 거의 무시하며 살지만 정작 깨닫는 것은 이럴 때. 잠깐 나를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알아채는 경우. 사실 온통 흙으로 범벅이 된 소매가 핏자국을 거의 가리고 있는데 말이다. 녀석의 검은 눈이 짙어지며 내 팔을 주시했다. 그러더니 내 뒤에 들어오는 계원이 놈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된 거냐.” “...글쎄.” “.........버터플라이에 당한 상처...같군.” “.......아마도 그럴걸.” 냉담한 이놈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언제나 폭발하는 것은 충두와 나. 바로 지금도, “미친 자식!! 어디서 또 찔리고 왔냐?!!” “하핫, 충두야. 5대 1이었다.” “자랑이냐?!!!” 속편한 대화를 나눌 상대라곤 녀석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웃을 수 있는 것에 안도했다. 하긴, 나야 원래 그런 놈이지만. “.....다시 또 이런 짓을 벌이면.....절대로 죽여 버린다.” 낮은 음성을 토해내며 다가오는 화인이 녀석. 나는 무의식적으로 녀석의 눈을 피했다. 녀석의 온몸이 녀석 답지 않은 초조함에라도 시달린 듯해서, 이를 갈며 말을 내뱉는 녀석의 눈이 지금 보면 분명 무서울 정도로 짙어졌을 테니까. 와락. .............!! 주먹이라도 날려댈 줄 알았던 화인이 놈이 황당하게 팔을 뻗어 내 등 뒤로 둘렀다. 녀석의 옅고 서늘한 숨결이 귓가에 느껴졌다. 나는 말도 못하게 충격을 받았다. “..............TV는 거실에 두면 안되냐.....” 머뭇거리며 이런 말을 내뱉는 녀석이 지금 날 안고 있는 화인이 놈 맞는지 내가 의심스러워하던 시점에는 뒤에서 충두 놈과 계원이 놈의 말이 들려왔다. “.....말도 안돼. 저 새끼 오늘 학교에서 엄한 녀석 수십명을-그것도 다 비류새끼네 반 놈들만- 족친 거 아냐?” “......봤다. 더구나 오랜만에 네 실력도.” “....푸하핫, 나 죽이지 않았냐? 솔직히 네놈도 나한텐 못당할 것 같지 않던?” “.................” 나는 잠시 아연해졌다. 대체 우리 반 놈들을 왜 화인이 놈과 충두 놈이 손대야만 했는가.(충두 놈의 요상한 말은 다시 패스다.) “.......소계원, 할말이 있을 텐데.” 나를 안은 팔을 풀 생각을 안하는 화인이 놈이 작게 중얼거렸다.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내 뒷목을 간질였다. “.........누가 한 짓이지.” “.....처리했다.” 녀석에게 안긴 채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던 내 시야에 계원이 놈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녀석의 딱딱한 가면 같은 표정이 잠시 흐릿해졌다. .........서툰 짓하지 말라는 건가...... 나는 여전히, 녀석의 경고를 잘 알아들었다. Fin. -------------------------------------------------------------------------------------- 갑자기 외전 3이 웬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외전 2편은 사기연 얘기이기 때문에 내용상 1편과 3편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빼고 올리기로 했답니다.(하하;) 비류녀석의 외도(?)죠. 화인이 놈에겐 최대의 위기..라 할까요?(퍼버벅) 아직 기억해주시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려요.(운다) Call the turn 외전 4 가능하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행복한가, 너는. 그의 온 생애동안 by 사리풀 “.....너도 슬슬 내 일을 하나씩 맡을 때가 되었지.” “아직 이릅니다.” “얼음 같은 녀석. 하긴, 내 일을 맡으려면 그런 게 필요해.” 아버지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그만 검은 가죽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원아, 요즘 손대고 있는 일은 뭔가 의미가 있는 거냐.” “........그저 개인적인 일입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차가운 쇳덩어리로 된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복도에 정렬한 채 고개를 숙이는 조직원들에게 냉담한 표정만을 지어보인 채, 나는 그 어두운 곳을 빠져나왔다. 하긴, 사실 어둡다는 것은 주관적인 평가. 지하 조직인 주제에 떳떳하게 서울 한복판에 커다란 본거지를 가진 사천회. 나는 그곳의 땅에 박힌 돌조각만큼이나 당연한 존재다. “....걸어가겠다.” 대기된 차를 보고는 그냥 걸어 나왔다. 예전에는 걸어서 학교에 가는 것 따윈 상상도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일정한 보폭으로 나아갔다. “....어이, 소계원. 모범 청년이 지각이라니.” “........한비류.” 교문 앞에서 주저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비류 녀석이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 웃음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다. “.......상담 상대를 잘못 골랐다. 연수호의 처리는 상황에 따라 보다 내게 익숙한 쪽일 수도 있어.” “...........짜식, 허세부리기는. 그런 거 아냐, 임마. 그냥 조금 궁금했다. 형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비류 녀석이 모래가 뭍은 교복바지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나와 비슷한 키의 녀석은, 나를 앞서 교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모르는 첫사랑이 있는 줄 몰랐군.” “아아, 중학생 때 선배였는데 1년도 채 안되서 이민 간다고 갔었거든. 그때는 한창 네놈들이 나를 굴려대던 때라 내 사사로운 연애사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을 때지.” 비꼬듯 말하며 녀석이 킬킬 거렸다. 나는 조금도 웃지 않고 녀석의 첫사랑이라던 연수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쩍 마른데다 작다는 것 외엔,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몸. 어디 하나 특이할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던 얼굴. 더구나 이미 2년 이상을 주룡회 하위 간부의 정액받이로 취급되어 왔던 남창을. 빌어먹을, 언제나 한비류는 내 이해범위를 벗어나있다. “..........화인이 놈이나 충두 놈은, 네게 ‘절대악’은 되지 못할 타입이야.” 다소 춤추듯이 걸음을 옮기던 비류 녀석의 발이 뚝 멈췄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 “.......나는 아니다. 네게 죽을 때까지 원망을 들어도, 화인이 녀석을 위하는 일이라고 판단되는 일을 한다.” “...여전히 멋대로 판단하시는군. 네놈의 꽁꽁 언 고깃덩어리 같은 심장 얘기라면 충분히 알아, 임마.” 다시 걸음을 옮기는 녀석의 뒷모습은 내게 익숙한 모양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위험을 피하는 타입이다. 협박과 강요는, 말하자면 내 전공이고. ........교실 문을 열 때에야 나는 내가 화나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하기 짝이 없는 나무문은 내 손자국으로 손잡이부근에 휑한 구멍이 생겼다. 작게 신음과 비명을 삼키는 선생과 교실 놈들에게 딱딱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는 이를 갈았다. 애초에 화인이 놈을 두고 눈을 돌릴 수 있다니. 나는 작게 실소를 하고 말았다. 녀석을 처음 보았던 건, 화인이 놈을 따라간 놀이터에서였다. 아주 조그만데다, 커다란 눈을 굴리는 게 버릇인 듯한 녀석. 화인이 녀석이 없을 때면 종종 동네 녀석들에게 얻어맞는 주제에, 금방 웃곤 하던 바보 같은 놈. 나와 충두는 사실 화인이 놈을 뺏긴 듯한 기분에 녀석을 무시했지만, 사실 무시당하고 있었던 것은 우리쪽이었다. 한비류는 그때부터 이상한 녀석이었다. 먼저 변한 것은 충두였다. 늘 옆에 있었던 나는, 어렸던 비류가 모래로 흙장난을 시작하면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충두 녀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한 무시에, 충두는 놀고 있던 비류 녀석의 머리에 모래를 쏟아 부었다. 화인이 녀석을 포함한 충두와 나는, 우리 외의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다. 단지 그랬을 뿐이지만, 비류는 머리를 작은 손으로 털어내고는 모래장난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화인이 녀석이 유치하기 그지없는 문제를 푸는 동안, 그네에 앉아 발장난만 했다. 그날 충두는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았다. 녀석으로서는 충격적인 하루였던 모양이었다. 화인이 녀석은 당시에도 늘 함께 지내는 충두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인형같이 냉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늘 녀석이 신경 쓰였다. 누구나 녀석에겐 그랬다. 녀석의 집에서조차 녀석을 대하는 데 애를 먹었다. 집이 가깝고, 아버지들끼리 친한 탓에 어려서부터 셋으로 묶였지만, 화인이 녀석은 혼자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화를 내는 때도 없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폐증이 저런 것이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서 선물했던 녀석의 생일선물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한쪽에 치워졌다. 하지만 녀석의 외모 탓에 늘 사람들이 모였다. 하지만 녀석들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충두와 화인이 녀석들 모두, 정작 나보다 빨랐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녀석들만 변했다. 화인이 녀석이 이해할 수 없는 외출을 시작하고, 조금씩 표정을 갖기 시작했다. 충두 녀석은 그 모래사건 이후로 매일 놀이터로 향했다. 사실은 화인이 녀석과는 상관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 새침하기 그지없는 녀석이, 비류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는 것이, 나는 여전히 이상했다. 하지만 내게도 변했다. 이상한 친구가 생긴 것이다. 맞고 있던 비류에게서 살덩이 같던 놈들을 떼어냈을 때, 드디어 녀석이 처음으로 웃어 보였을 때, 화인이 녀석이 뒤늦게 우릴 보고 (아무도 몰랐겠지만)실은 질투심 섞인 뾰로퉁한 입술을 내밀었을 때... 친구가 먼저였다. 후회는 그 다음이었다. 화인이 놈이 총을 맞았던 그날 이후로, 늘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언제나 친구였다. 화인이 녀석에게 반한 건, 그 다음이었다. “.....저, 연수호가 한비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핸드폰에서 내 지시를 받은 간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득 짜증스러워졌다. 어느새 우리의 지정석처럼 된 옥상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고3이 된 이후로, 다른 녀석들도 이곳 출입이 뜸해졌다. 후, 비류 녀석 외에는, 모두 아무래도 상관없을 텐데, 대학정도는. “.......무시해. 알아서 비류에게 가는 연락은 차단하도록.” 내 목소리가 무감각하게 귀를 울렸다. 충두와 비류 녀석이 언제나 정 떨어지는 목소리라고 중얼대던 것이 떠올랐다. 악역에 적격인 목소리겠지, 아마. 잘됐군. 핸드폰을 닫으면서 쓰게 웃자니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충두 녀석이었다. “....오오, 오랜만에 수업 제꼈구나.” “.......글쎄.” “.....윽, 썰렁한 새끼. 암튼 네놈이나 화인이 놈이나, 재미없기론 사람 죽인다니까.” 투덜거리며 내 옆에 주저앉는 충두 녀석이 붉게 염색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녀석의 귀에 그새 몇 개 늘어난 구멍을 보면서 비류 녀석이 난리칠 모습을 떠올렸다. “담배도 안 피운듯한데 뭐 하러 올라왔냐? 아까 창문으로 너랑 비류 새끼 같이 오는 건 봤는데. 비류새낀 아까 화인이 놈한테 끌려왔으면서 또 언제 나갔냐?” “...........눈치 빠른 녀석.” “....뭐야, 씨발아. 엊그제 가출한 그 새끼 니가 데려올 때부터 수상했어. 화인이 놈이 언제까지고 모른척할 놈도 아니고.” “........너도 모르는 척 해.” 충두 녀석이 다소 여성적으로 생긴 얼굴을 찌푸렸다. 입만 열면 생기는 언밸런스에 이미 익숙해진 나야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그 새끼, 또 아랫도리 휘두르고 다니냐?” “......정신적인 거다. 녀석이 사랑을 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나.” 나는 천천히 옥상의 서늘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더 이상 있다간 분명 귀찮아 지겠지. “..........으헉, 미친!! 그 새끼 진짜 돈 거 아냐?! 야, 제대로 말해봐!! 엉?!!” 하긴 벌써 시끄럽긴 하군. 충두 놈이 예상대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화인이 녀석에 한한 것을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난 후다. 보다 날카로워진 녀석의 표정이나, 시니컬한 표정 따위에 반응하는 중심은, 내겐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절망스러웠던 것은, 녀석의 직선적인 감정표현. 빌어먹을, 화인이 녀석의 감정을 모르는 것은 비류뿐이었다. “..........비류를, 비류를 만나게 해줘요!!” 연수호였다. 나는 사천회의 지부에까지 쫒아온 연수호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화가 났다. 이 녀석은, 자신과 녀석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더럽게 굴러다니던 남창 따위가. 조직원들이 그 작은 녀석을 밀어내자 녀석은 금방 넘어졌다. 한손에 달랑 들려 끌려가는 녀석을 냉담하게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녀석은......사기연을 닮아 있었다.... 아니, 사기연이 저 녀석을 닮은 건가. 나는 연수호와 비류 녀석의 일에 이렇듯 마음을 쓸 이유가 없었다. 달라지는 건 어차피 없을 테니까. 지금의 화인이 녀석이, 비류 없이 어떨지를 떠올리는 것은 두려울 정도다. 그것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비참함과 고통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녀석과의 여름을 기억한다. 폭주를 시작했던 그 비류가 없던 여름에, 아직도 내 배에 가늘게 이어진 나이프 자국 이상의, 끔찍한 기억이 있다. “.......이럴 거면 왜 돌아 온 거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늘 생각하지. 너에겐 화인이 놈이 아깝다, 한비류.” “...푸, 부러우면 가져가시지.” 녀석은 취해있다. 벌써 반 이상이 비워져있는 양주병을 녀석이 손목을 비틀어 입에 부었다. 한비류는, 그다지 술이 센 편이 아니다. “......실은, 소계원...죄책감이다, 이건.” “...네가 안아댔던 수많은 상대에게도 이랬던 기억은 없는데.” “.......야,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네놈들이랑 왔던 술집도 아닌데.” “.......사천회 관리의 바다.” “...제기랄.” 비류 녀석의 입이 비틀어졌다. 나는 녀석의 앞에 밧데리가 분리된 채 버려져있는 녀석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밧데리를 끼우고 전원을 키자 곧 들려오는 벨소리. 나는 한숨을 집어 삼켰다. 맙소사, 이 녀석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나는 액정에 뜨는 화인이 녀석의 이름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왜 핸드폰을 받고 이 녀석을 데려가라고 하지 않는 걸까. “......일주일 주지.” “........뭐?” “...확인하는데 일주일을 주겠다. 그게 사랑이건 죄책감이건, 너는 물론 돌아오는 거다.” “.........소계원...” 한비류는 술이 깬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하긴, 나도 내가 놀랍다. 빌어먹을. “........연수호의 집은 알겠지. 일주일만 막아주겠다.” “....미쳤군.” “...그런 것 같다. 안갈 거냐.” 나는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한비류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지식한 자식. 빚 갚는 거냐.” “.....결국엔 널 죽이게 될 것 같지만, 일단은.” “...............고맙다, 소계원.” 녀석은 일어서서 바를 나가며 중얼거렸다. 나는 남아있던 술잔을 입에 대며 비류 녀석의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받았다. “.......나다. 녀석이 있어서 행복 하냐, 권화인?” 네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내 온 생애동안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어차피 평생 행복할 방법이 없는 녀석을 사랑한, 나는 바보가 아닌가. 제기랄. Fin. --------------------------------------------------------------------------------------- 결국 비류를 보내버렸습니다, 계원이 녀석. 어휴, 뒷일을 어찌 감당하려고..(누가 한 짓인데!!) 어쨌든 이사건은 외전 5편에서 대충 결말이 나겠죠. 외전주제에 이런 대형 사건을 터트려도 되는거야, 비류야?? (그러니까 누가 한 짓이냐고?!!!) Call the turn 외전 5 Believe or not. by 사리풀 나는 술의 마력을 숭배하는 사람이지만, 술에 인생을 망친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빌어먹을 계원이 자식. 술 취한 놈을 부추기다니!)<-남 탓을.. 눈을 떴을 때, 내 셔츠의 앞부분을 꼬옥 쥐고 있는 작은 손은, 언젠가 보았듯이 흉터 투성이의 비쩍 마른 수호형의 것이었다. 몸을 온통 웅크리고 내게 기대어 잠든 형의 모습을 보노라니, 나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형의 얼굴과 몸에 새로 생긴 상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잠이 확 달아났다. 형의 쌍꺼풀 없는 눈이 감긴 채 파르르 떨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잠이 드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나는 새롭게 알았다. “......헤어질 때보다 조금도 자라지 않았군....” 나는 마른 형의 몸을 똑바로 펴면서 중얼거렸다. 160cm정도 밖에 되지 않을 작은 키. 푸르게 느껴질 정도로 햇빛을 받지 못한 흰 피부. 그나마도 멍과 상처로 울긋불긋하지만. 하지만 나는 많이 변했다. 한눈에 나를 알아봤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새 까끌하게 느껴지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면도한 게 언제더라. 수호형은 모범생이었다. 기억하기로, 선생들도 알아주던 성적이었던 것 같다. 우습게도 나와는 내가 낮잠 자는 장소로 즐겨 애용하던 도서관에서 만났다. 큭, 내가 베고 자던 책을 빼내려고 애쓰다 내 잠을 깨워버렸지. 내게는 베기 딱 좋을 두꺼운 그 신화책이 형이 찾던 책이었다고, 후에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른 책을 베고 자면 그뿐이었다. 그 당시 형은,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감정이 변하고 깊어지는 것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운 일이다. 화인이 놈도, 처음부터 내게 집착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처음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후회로 가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담배에 무심코 불을 붙이려다 죽은 듯 잠들어있는 수호 형을 내려다보고 지포라이터를 내렸다. 곰팡이 냄새마저 나는, 이 좁은 방에서 이 작은 사람은 얼마나 오래 두려움에 떨었을까. 겁은 누구보다도 많은 주제에. “......비....류야......” 잠꼬대로 내 이름 따위 부르지 마슈. 형은 어차피 그럴 자격 없다고. 이렇게 굴릴 몸이었으면 처음부터 건들일 수도 없을 것처럼 깨끗하게 보이질 말던가. 댁은 작다는 거 빼면 사실 이 바닥에 들어올 외모도 아니잖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 내가 안았던 누구도, 당신만큼 평범하게 생기지는 않았어. “......으흑.....비류야.....” 제길, 울보 같으니. 눈치는 꽝인 주제에 타이밍은 죽인다니까. 내가 못생겼대서 자면서도 우는 거유? 빌어먹을, 그만 울라고. 나도 잘난 외모는 아니니까, 딴에는 딱 맞다고. 나는 몸을 둥글게 말며 자면서도 눈꼬리에 눈물을 매다는 수호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 부드럽던 머리만은 여전하군그래. 쓴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권화인, 나 이제 어쩌냐. “......미친 계원이 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냐. 니가, 좆같은 감정에나 휘둘리는 니놈이,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냐. 단 일주일이라도, 나보다 녀석을 더 잘 아는 네 놈이. -언젠가 사랑을 하게 되면, 장담하지만 곱게는 못 죽을 거다, 새끼야. 충두 놈이 던힐을 물면서 나직하게 말했었다. -킬킬거리지 마, 씨발아. 니놈은 죽자고 빌어먹을 감정에 목매달 놈이야.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않을, 뇌가 개미보다도 못한 놈이라고. -푸하하, 충두야, 드디어 미친 거냐. 대뜸 사랑타령은. 난 그 단어에 이가 갈리는 놈이라고. -....혹시 한다면, 화인이 새끼랑 해라. -............ 충두 놈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담배를 옥상 아래로 집어던졌다. 나는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음음, 그러니까, 버섯은 뭐하러 사?” “고기랑 구워먹으면 맛있다구요. 윽, 좀 한 움큼 집어요. 그깟 버섯 얼마나 한다고...” “하지만 벌써 많이 샀잖아. 삼겹살에 상추에, 이것저것...” “형은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혹시 초등학생으로 오해받은 적 없어요? 키가 작은 건 어쩔 수 없지만, 너무 말라서 돌멩이만 해 보여요.” 형은 입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더니 뭔가를 웅얼거렸다. “........크게요.” “...뭐?” “그렇게 작게 욕하면 들리지도 않아요. 크게 욕해요. ‘멍청이, 한비류!!’이렇게요.” “...........‘바보, 한비류’였어..”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그런 귀여운 욕은 하지 않는데.” “.........내가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 수호형은 눈썹을 모으며 툴툴거렸다. 나는 모르는 척 계산대로 카트를 밀며 코웃음을 쳤다. 맙소사, 누가 봐도 나를 형으로 볼 거라고. 그것도 나이 차이 많은. “어엇, 비류야!! 지나가면서 아무거나 집어넣지 마!!” 종종거리며 내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작게 울렸다. 마트는 한산했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수호형은 저렇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적어도 이곳에서 날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쌀은 있어요?” “....저기, 햇반 사다가 끓는 물에 데워줄게...” “맙소사, 있는 건 버너에 쬐끄만 냄비 하나가 다로군.” 나는 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뭘 먹고 산거지, 이 사람. “...그런데 정말 학교 안가도 되니, 비류야?” “.......일주일동안 안갈 겁니다.” “.....고3이잖아....” “...그래서 싫다구요?” “.............너무 좋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게, 형의 버릇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대에 물건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제길, 형 집까지 이 많은 걸 들고 찾아가려면 고생 좀 하겠군. 배를 채운 뒤, 수호형은 벌려 놓은 것을 치운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름이 튄 데에, 청소도 만만치 않겠지만 나는 정작 형의 구형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런 나를 본 수호형의 표정이 불안한 듯 굳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렸다. “....음, 시간이나 볼까 해서요.” “......어, 아마 오후 두시정도 됐을 거야.” 형의 얼굴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멀리 던져두고 몸을 일으켜 그릇들을 치우고 있던 수호형의 팔을 잡았다. “나중에 하고 어디 놀러나 가요.” “.....어, 저기.....이 근처엔 별로 갈 데 없어.” “.......아무렴 유흥가 뒷골목에서 놀데를 찾겠습니까. 더구나 형을 데리고?” 수호형의 표정이 순간 상처 입은 것처럼 당혹감을 띠었다.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형이 어려 보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요?”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없다는 거예요?” 나는 짐짓 실망스럽다는 투로 어깨를 내렸다. 형이 서둘러 입을 뻐끔뻐끔하더니 소리쳤다. “......서, 서점!!” 크게 소리쳐놓고 얼굴을 붉히는 수호형. 나는 그제야 형이 중학교 중퇴라는 것이 떠올랐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이민을 이유로 자퇴를 했던 것이다. “.........그럼 이왕이면 대형서점에 가볼까. 사고 싶은 책 있어요?” “...책은 보는 것만으로 좋아.” 수호형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했다. 나는 황당하게도 취미가 독서인 또 한 녀석이 떠올랐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수호형과는 전혀 상반되는 녀석을. -제길, 니가 책 읽을 때 내가 못 움직이는 이유가 뭐냐. -........니가 없으면 책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피식 웃으며 내게 방에서 나가지 말 것을 종용하는 화인이 녀석이 황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못이기는 척 잠자코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실은, 녀석이 책 읽는 모습은 화려한 그림 같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녀석이 나무 양각이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그 노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긴 속눈썹으로 진한 검은 눈동자를 반쯤 덮어내면서, 혹은 섬세한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는 모습 등이.... “제기랄.......” “......비류야.....?” “어서 가죠.”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수호형을 서둘러 끌어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순식간에 모든 머릿속을 점령해버리는 네 녀석. 고작 ‘책’이란 소리에 곧장 녀석을 떠올리는 나의 대뇌. 말도 안되는 연상법이야. 혹은 네가 세뇌에 천재였던지, 권화인. “우와, 책이 많아, 비류야...” 서점에 책이 많은 건 당연한 일 아니유. 그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동 먹을 일인가. 나는 도통 따분하기만 하구만. 혹시 비닐 포장이 뜯긴 포르노 잡지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수호형은 내 셔츠의 끝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나는 내 어깨에도 닿지 않는 수호형의 가르마를 내려다보면서 작게 한숨을 삼켰다. 순진한 척 하는 건가, 아니면 순진이란 천성인걸까. 형을 보고 있자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류야, 책값 무지 비싸졌다......” “아아,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사요. 아니면 책에 손떼나 마구 묻혀서 값이라도 깎을 생각입니까.” 갖고 싶다고는 못하고 책만 만지고 있는 게 심술이 나서 냉랭하게 말하자 형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니까 갖고 싶은 건 갖고 싶다고 말하란 말이에요. 책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다구요.” “하지만.....이건 꼭 뭘 바래서 널 잡고 있는 것 같잖아.....” 수호형의 볼에 작은 물줄기가 그어졌다. 제기랄, 내가 아는 어떤 여자도 이 사람처럼 수도꼭지는 없었어! “.......형,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형이 잡아서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그...” “그리고......” “그만!!” 형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소리쳤다. 언제나 신경 쓰던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없이 급박하게. 나는 다시 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마치 그날 같다. 그날...... 쿵. 가슴 밑바닥에서 둔탁하고 깊게 울리는 무엇인가가 들렸다. 나는 한동안 멍해져서 가만히 서있었다. 형은 울고 있었다. 그 작은 어깨를 떨면서. 하지만, 그 녀석도 울고 있었어.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런데 나는 왜 이곳에 있지...... “비류야.......미안...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너는.......이해해줘...” 힘겹게 말을 잇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억지로 미소를 띠고 책을 들춰보는 척 해보였다. 나는 형의 어색한 연기를 모른 척 했다. 시간과 사건의 순환. 하지만 모든 것은 다르다. “비류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베고 자던 게 ‘일리아스’였어.” 형은 낯익은 두꺼운 책을 두 손으로 내 눈앞에 흔들며 웃었다. 아마도 그 머리 아플 책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는 보는 눈도 아랑곳없이 서점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아, 비류야!! 뭐하는 거야?!” “나는 원래 책만 보면 졸립단 말입니다. 잘 알잖아요?” 나는 다소 심술궂게 말하며 주변의 시선을 무시해버렸다. 다른 이유로, 다리의 힘이 빠졌기 때문에. 형은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시간이 돌아간 것 같다. 책이 있었고, 나는 언제나 말썽만 부렸고, 형은 곤란해 하며 웃었다. “잠은 집에 가서 자자, 비류야. 금방 돌아갈게.” 내 팔을 잡아당기며 수호형이 말했다. 나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간은 흘렀다. 맙소사.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비류 넌.” 수호형이 정말로 기쁘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무언가가, 방금 머릿속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른척하고 있었다. “쳇, 무슨 책이 이렇게 두꺼워요? 더구나 ‘일리아스’라면 예전에 읽었던 거 아닙니까.” “응, 하지만 다시 읽고 싶어. 추억이거든.” 서점을 빠져나오며 수호형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나는 형의 가는 팔을 잡고 공원으로 향했다. 무더운 공기가 가는 내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대로 입고 잔 통에 심하게 구겨진 T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여름에는 늘 잘 돌아다니지 않는 성격이었다. 제기랄, 화인이 놈은 여름에만은 차를 타고 통학하기를 주장했었다. 언제나 투덜거리며 들어선 차에는, 에어컨으로 잔뜩 차가워진 가죽 시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분수다! 시원해 보여.” “가까이 가면 다 젖을걸요.” “응응.”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수호형에게서 책을 받아들며 형에게 가까이 가보라는 눈짓을 했더니 기쁜 듯 얼굴이 환해진다. 조심스럽게 분수로 다가가는 뒷모습은 여전히 작은 채다. 어째서 그깟 분수에 다가가는 것에도 저렇게 겁을 먹는 걸까. 나는 근처의 벤치를 찾아 앉으며 저녁 무렵이 되자 슬슬 공원으로 걸어 나오는 가족들과 연인들을 무감각하게 쳐다보았다. 무릎에는 수호형이 맡기고 간 ‘일리아스’가 놓여져 있다. -그거, 그리스 신화예요? -응, 맞아. 트로이 전쟁의 앞부분 얘기랄까.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그런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참 이상하지? -.......끔찍한데요. -그래? 기억이란 이상하다. 하나씩 물꼬를 트고, 샘처럼 솟아난다. 그것은 당시에도 의미 있게 저장된 자료들이 아니다. 의미 없는 기억들의 조각. “비류야, 분수가 정말 예뻐. 너도 가까이 가봐.” “.......됐어요. 앉아있는 게 낫겠어요.” “어, 책 보고 있었어? 비류도 읽어봤니, 그리스 신화?” “아아, 나는 도통 책에는 관심이 없어서...더구나 신화라니 따분하잖아요.” “....하지만 네 친구들은 모두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았었는데...아직도 그애들이랑 친해?” 내 옆으로 와 앉으면서 수호형이 물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아아,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치고 녀석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죠, 뭐.” “그땐 종종 무섭게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얼굴에 상처 남으면 어쩌나 했어. 친구들이라지만 좀 무서운 애들이어서...” “큭큭, 대련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때는 아직 작았었으니까.” “응, 키가 정말 많이 커서 놀랐어.” 벤치에 앉은 수호형의 발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게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도 그때는, 이렇게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거, 기억해요? 나보고 무슨 신 같다고 했었죠?” “아, 그......그랬나......” “화인이 녀석보고는 또 무슨 신 같다고 했었고...하긴, 나야 들어봐야 뭔지도 모르지만.” “..........아폴론.....” “......뭐요?” “.....아, 아니. 네가 아폴론 같다고 했었어.” “..........그랬던가?” 수호형은 기이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서둘러 대답했다. 나는 왠지 어색해진 분위기에 벤치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럼 선배는 뭐예요?” “....히아킨토스. 아폴론의 사랑을 받은 히아킨토스.” “.........그거 여자 아닙니까.....;;” “엑, 아냐. 소년이야.” “뭐야, 아폴론이란 신, 남색가였어요?” 수호형은 내 등을 작은 손으로 꼬집으며 중얼거렸다. “....고대 그리스엔 원래 동성애가 있었어......”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수호형의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분수의 물방울이 멀리서도 튀어왔다. 형은 코끝에 묻은 물방울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 “.........소계원 끌고 와.” 뚝. 전화는 끊겼다. 한치의 이견도 용납 않겠다는 듯이. 나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받던 포즈대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이 움직이는 체스 말을 보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씨발.” 나는 작게 내뱉었다. 분명 누구에게든 경고를 했다. 비류 새끼에게, 혹은 계원이 새끼에게. 둘다 고집은 쇠심줄 같지. 남 똥줄 타는 줄은 모르고! “.......존나 머리 나쁜 새끼들.” 비류 새낀 원래 그렇지만 계원이 새끼는 왜 나서! 도끼로 찍어도 피한방울 안 흘릴 놈이, 그 잘난 머리는 시험 볼 때나 굴러가냐! 나는 서서히 아래가 비치는 유리 탁자위에 입술에서 뺀 피어싱을 던졌다. 쇳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작은 쇳조각. “정충두, 녀석들의 일에 깊게 개입하지 마라.” 언제 거실로 기어 나왔는지 둘째형이 은테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귀에서 피어싱을 빼내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 뚫은 곳에서 피가 다시 새어나오는지 손가락 끝에 거뭇한 피가 묻어있다. “......처음부터 말했을 텐데. 권화인이 이를 갈기 시작하면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둘째 형이 솜에 소독약을 묻히면서 말했다. 나는 필요 없다는 듯이 팔을 휘젓고는 다시 남은 피어싱을 빼기 시작했다. “형씨가 승인 형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얘기냐? 정충기, 병원은 어쩌고 또 집에 와있냐?” “......후, 권승인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건 현명해서다, 정충두. 하지만 그 녀석은 한계를 알아. 냉정하지만 나를 건드리는 모험은 안하지. 손해가 더 크다는 걸 아는 거다. 하지만 권화인은 아니야. 잘 화를 안내는 놈이지만 너나 계원이 녀석을 건드리기로 마음먹으면, 계산 따윈 안할거다.” “......정충기, 승인 형 좀 움직여 줘라. 화인이 새끼 지금 계원이 새끼랑 붙기 직전이야.” “...........대형사고군. 소계원을 건드리면 사천회도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다시 말하지만 개입하지 마라. 우린 정계에 있는 집안이다. 그 싸움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 “씹, 지금 이게 조직싸움인 줄 알아?!” 둘째형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무심하게 거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창 밖을 바라봤다. 어둠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로등. 비류 녀석이 사라진 지, 정확히 하루. 미친 새끼, 저번처럼은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면서 현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화인이 새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루면, 녀석의 인내심이 바닥나긴 충분해. 쳇, 계원이 놈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볼까. 나는 담배에 느릿하게 불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가늘게 휘는 담배연기가, 흐릿하게 빛났다. ----------------------------------------------------------------- 오늘 하루 종일 이리저리 돌아다닌 통에 피곤했는지 수호형은 책을 양손으로 쥐고는 잠이 들었다. 나는 담배와 라이터를 쥐고는 수호형의 단칸방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느새 주위는 온통 어둠이다. 별도 빛나지 않는 밤. 쳇, 비가 올 것 같군. “소계원, 살아있냐...” 나는 킥킥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제길, 오늘따라 담배가 쓰다. 도둑고양이가 시멘트 긁는 소리를 낸다. 어둠 속의 인기척. 감각신경이 반응한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동네엔 없는 게 없군. 매춘, 술, 도둑고양이까지. “빌어먹을.......” 나는 소리내어 중얼거리면서 헐거운 나무문에 등을 기댔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는 썩은 나무. 제대로 된 것도 없는 동네야. 이 쪽은 특히나 물이 안좋아서 나도 발길을 않는 유흥가. 멀리서 희미한 노랫소리와 붉은 불빛이 비쳐든다. “왜 물어보지 않니.....” “!!” 문 안쪽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깨어버린 모양.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은 그냥 흙이다. 서울에 아직도 맨바닥이 있었다니, 신기하군. “.......관심 없어요.” “..........” “............그 동안의 형 과거를 포함해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보다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끼익. 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인 수호형이 젖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잘근 씹었다. “.......나, 싫지 않으니까......” 형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나 형 쉽게 안을 수 있어요. 사실은, 그럴 생각이었는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응, 저기, 나........” “........고개 들어요, 형. 바닥만 보고 있는 상대가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수호형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바닥에 앉았던 몸을 일으켜 수호형을 마주봤다. “.....키스해주길 바란다고 해봐요. 내 눈을 보고.” “.........어.....키...키스......읍....” 부드러운 작은 입술을 덮었다. 내 첫사랑의 입술에선 순수의 향기와, 퇴폐의 이중적인 맛이 났다. 머뭇거리는 입술과 조금씩 채근해오는 혀. 나는 입술을 살짝 머금고만 있다가 수호형의 몸을 떼어냈다. 동그란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나 놀만큼 놀았어요. 이런데서 굴러다닌 남창이 부끄러워한다는 건, 미안하지만 안 믿어요.” 나는 다소 냉랭하게 웃으며 형의 손가락을 들어 살짝 깨물었다. 탄성과도 같은 미약한 신음. 내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형은 다리에 힘이 빠진 듯 더욱 내게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살짝살짝 형의 귓불을 애무하면서 그 살결의 냄새를 확인했다. “.........왜.....” 형은 눈에 욕망으로 인한 물기를 가득 담고 나를 올려 보았다. 나는 형의 옷을 벗길 생각도 안하고 얼굴주위에 키스만 반복하고 있었다. 형의 내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부당하는 두려움.......나는 모르는 것. 당신, 누구에게.........? 순간 나는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의식도 못하는 사이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류야?” “...아니, 오늘은 피곤하지 않아요? 오늘은 이 키스로 만족해요.” 나는 장난스럽게 형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를 문안으로 밀어 보냈다. 나야, 해결 봐야 할 문제가 남아있었고.....(젠장) -------------------------------------------------------------- “이런, 제기랄, 한낱 남창 때문에 내 얼굴을 이렇게 구기게 해?!” “형님, 진정하세요. 그게 연수호가 사천회의 소계원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도무지..” “으아악, 빌어먹을!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감히, 이 주룡회의 표시준에게!! 으, 씨바알~!!” 의자를 들어 사열해있는 조직원들에게 집어 던진 후, 표시준은 숨을 골랐다. 최근 주룡회에서 빠르게 세력을 모으고 있던 표시준이었기에 사천회의 후계자라지만 한낱 애송이가 턱짓으로 제 것을 빼간 것은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야, 멀대. 연수호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 알아봐.” “형님, 어차피 구멍도 헐거워질 대로 헐거워진 놈인데요. 그냥 잊어버리시는 게......” “니미, 너 지금 내가 쑤실 구멍 없을까봐 이러는 거 같냐?!” “.......그치만 소계원이 개입된 일은.......” “개새끼, 그거 조져버릴 거야. 언제까지 주룡회가 사천회에게 눌려있을 순 없잖아!!” 표시준은 이를 갈며 눈을 부릅떴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멀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잔인한 자다. 그게 표시준을 보아온 요 몇 개월간의 평가였다. “큭, 연수호가 어떻게 소계원을 구워삶았지? 어쨌든 그게 약점이라면야, 우스울 정도로 쉽군.” 하지만 어리석어. 멀대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연수호가 소계원의 약점이 될 확률은 전혀 없었다. ---------------------------------------------------------------- 쾅. 어둠과 정적을 찢어발기는 한순간의 소음. 권승인은 서재에서 서류를 훑어보다 무심결에 유려한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의 단정한 얼굴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한참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달갑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의 입술에서 짜증 섞인 몇 마디가 작게 튀어나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서재를 나서 소음이 난 곳으로 향했다. “.........잘 시간이 지났을 텐데.” “..............꺼져.” 동생의 방은 부서진 탁자의 나무 파편으로 엉망이었다. 미동 없이 돌아보지도 않는 동생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권승인은 한숨을 쉬었다. “..........흥미를 잃을 한도가 훨씬 지난 장난감이다. 어차피 불량품이야.” “..................” “언제든 처리할 생각이었고.” 휙. 순식간에 권승인의 미간을 스치고 지나가는 나이프가 그의 뒷벽에 가 박혔다. 눈썹의 약간 위에 살짝 그어진 혈흔에 권승인이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는, 위협을 참아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설령 하나뿐인 동생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가 막 분노를 토해내려 했을 때, 그의 동생이 슬쩍 몸을 돌렸다. “.......당신은 아니군. 하기야, 원래 소계원이 더 유력했지만.” 권승인의 혈관 하나하나에서,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자신의 상대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그는 긴장감이 서린 미소를 지었다. 벌써 내 코끝에 발톱을 들이댈 정도로 자란건가. 그의 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아니면, 앞뒤 못 가리고 덤벼드는 아직 어린 맹수일까. “..........큭.....푸하하하, 내 동생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할아버지가 기뻐하실 거다.” 권승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권화인은 웃지 않았다. “.............나가. 아니면, 날 막을 자신이 있나.” “.................후, 건방떨지 마라. 넌 따로 상대해야 하는 녀석이 있을 텐데.” 권승인은 입가를 비틀어 웃어 보였다. 늘 권화인의 입술에 머물던, 놀랍도록 꼭 닮은 미소였다. 그러나 정작 권화인의 얼굴엔,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권화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권승인을 지나쳐 자신의 방문을 나섰다. “....권화인.” “..................”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라. 하지만 자신 없으면 애초에 포기해. 소계원을 건드리는 건, 사천회 전부를 건드리는 거다.” 권화인의 발이 조금 멈칫하다 다시 앞으로 향했다.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자신의 동생에게 권승인은 싸늘하게 웃어보였다. 죽어버려도, 이번엔 상관 안할 거다. 그는 여유롭게 다시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 붉고 흉한 얼굴을 한 악마가 내 침대 발치에 기어 올라왔다.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내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니, 밀랍 같은 아이야. 나는 악마의 울퉁불퉁한 검붉은 손이 내 이불의 아래를 쥐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잿빛 눈의 아이야. 나는 악마의 누런 이가 드러나는 벌린 입에서 떨어지는 타액이 내 이불의 중앙을 적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갖고 싶은 게 뭐야, 검은 피의 아이야. 내 얼굴에 더운 입김을 뿜어내면서 악마의 이리저리 굴러가는 파충류 같은 눈동자가 한바퀴를 빙 돌았다. -.........녀석을, 내게 줘. -끼릭, 끼릭, 끼릭. 그건 너무 쉬워. 쉽다구, 끽. 악마는 생쥐처럼 웃으며 내 침대 위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다음날 정신과의사는 당황해하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쁜 꿈을 꿨구나. 천만에. 다시없을 유쾌한 꿈이었지, 큭. “.........이렇게 맞아 주는 건, 처음이군.” “미친 새끼, 좆나 급했나보네.” 정원으로 들어서던 소계원과 정충두가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확히 하루를 기다려줬다. 외박이라.......하! “...........일주일 뒤엔, 분명 돌아올 거다.” 소계원의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귓가로 날아왔다. 나는 씩 웃었다. 내 뒤통수를 치라고, 너를 달고 다닌 줄 아는 거냐. 내 눈동자에서 싸늘한 기미를 느꼈는지 정충두가 눈썹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소계원, 니 새끼 행동은 나도 이해 안돼. 설명이라도 제대로 해, 새꺄!” 정충두가 톤이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소계원은 입을 꾹 다문 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시선. 손등의 푸른 심줄이 나도 모르게 돋아났다. 큭, 주체도 못할 지경인건가. “......권화인, 일주일을 못 기다리는 건가.” “.........큭, 그런 문제가 아니지, 소계원.” 입술이 기묘한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연 데, 녀석들이 좀 더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거슬려. “............언젠가도 말했지만,” “.................” “........녀석에 대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나다.” 소계원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퍽. 녀석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는 주먹을 내리면서 여전히 꼿꼿한 녀석의 자세에 조소했다. 맞아주었다는 건가. “....퇫.” 소계원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고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녀석의 가면 같은 얼굴을 주시했다. “..........너답지 않아.” “................” “............이성을 잃지 마, 권화인.” 소계원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소계원의 배를 걷어 차버렸다. 굳건했던 녀석도, 작게 신음을 뱉어내면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는 연이어 녀석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 것은 녀석의 고개를 피하는 동작으로, 먹히지 않았다. 소계원이, 정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비가 오기 시작하네.” “........그렇군요.” 어두운 좁은 방에 누워서 수호형이 중얼거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천장의 곰팡이 무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빗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다. 수호형도 나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 너를 떠난 지, 이제 하루. “.........내일은 뭐할까요?” “...어, 비 오지 않을까?” “.........글쎄요..” 나는 무감각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수호형도 잠이 들려는 지 숨소리가 깊어진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눈을 뜨는 건 희미한 빛 때문일까, 깨어있다는 실감 때문일까. -감기 걸리지 마라. 비가 오면 내 머리를 톡톡 치면서 화인이 녀석이 말하곤 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녀석이 내게 지어보이는 미소를 모른 척 했다. 그건 아름답지만, 중독성이 있는 미소. 녀석은 나와 같이 살게 된 이후로, 곧잘 그렇게 웃었다. 자상한 표정과 한숨이 섞인 것 같은, 뭔가 걱정스런 미소. 웃음 하나에도 온갖 감정을 섞을 수 있는 그 놈도 웃긴 놈이야. 어떻게 웃든 예쁜 것도 문제고. -잠에서 깰 때가 제일 이쁘군. 녀석은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며 큭큭거렸다. 나는 자다 깨서 황당함에 입을 벌렸지. 그건 순전히 놈의 농간이었어. 그 틈에 덥치다니. 더구나 그런 대사는 내가 여자 꼬실 때도 안하던 대사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녀석이 잠이 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이 들고, 녀석보다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흐릿한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뜻한 작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전혀, 다른 손. 그 손은 이렇게 연약하지 않아. 나는 작게 웃었다. -정작 미친 건, 나인지도 모르지. 악마에게 널 달라고 했거든. 기억속의 녀석이 쓰게 웃었다. 내 코끝에 작게 키스하면서. 하지만 밤은 모든 걸 묻는다. 머릿속을 때리는 빗소리도 포함해서. -------------------------------------------------------------- “아아, 네 동생이라면 우리 집에 와있다, 정충기.”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로 걸음을 옮기면서 권승인이 전화에 대고 말했다. 가로등불빛으로 밝은 정원에 흔들리는 노란 머리칼이 보이자 그의 입술은 작게 실소했다. 실망스럽군. 고작 주먹질이나 하겠다는 건가. -충두 놈 다치면 큰 형 가만 안 있을 거다. 관여시키지 마. “쿡, 사랑받는 막내라는 거냐? 정충기, 넌 네놈 동생을 너무 모르고 있어.” -............이해가 안가는 건, 충두 놈이 거기에 연관될 이유가 없다는 거다. 시작은 권화인이 하고, 상대는 소계원일 뿐이야. “그리고 상품은 한비류라는 건가? 수지 안 맞는 장사로군.” 권승인이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작게 질투의 감정이 스쳐 지났다. “사천회의 늙은이가 소란스럽겠어. 우리 집 정원에 오면 피로 물든 붉은 잔디를 볼 수 있을 거다.” -말해두지만 우린 연관되지 않겠어. 정충기가 다시 한번 못 박듯이 말했다. 권승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답했다. “피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 맹수 있나?” 그의 검은 눈동자는 담배를 던져버리고 두 녀석에게 달려드는 붉은 머리를 향하며 작게 조소했다. 아무렴 사자 무리에, 저 혼자만 토끼일 리가 있나. -------------------------------------------------------------- “비류야, 일어나서 밥 먹어.” 수호형이 주섬주섬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힘을 들여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밖에........비와요?” “어? 조금.” “흠.” “....왜?” 금방 흔들리는 저 동그란 눈.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치 않은 눈. “형, 나 사랑해요?” “......뭐, 뭐?!” “이거야, 사기당한 기분이야. 뭐예요, 그 당황한 표정은.” “니, 니가 갑자기 그런 소릴 하니까!! 밥상 엎을 뻔 했잖아!!” “크크크.” 나는 낄낄거리면서 형이 그제까지 들고 있던 쟁반을 받았다. 목까지 붉어진 수호형이 부끄러웠는지 물을 가지러 간다면서 방을 나가버린다. 오랜 기억에도 수호형의 뒷모습은, 언제나 허둥대는 모습. “........저게 연기라면, 끝내주겠군.” 나는 바지 뒷주머니를 뒤지면서 쓰게 웃었다. 구겨져 나온 담배가 눅눅하다. “......사랑...해....” 문틈으로 조그맣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빗소리가 섞여들었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눈을 감았다. “...............” 대답하지 않은 건, 나였다. 빗소리가 커졌다. 긴장하고 있을 문밖의 옅은 숨소리는, 어차피 들리지 않을 것. “........진심이 되게 해봐요.” “..............?” “............나를.” 나는 담배를 씹으며 웃었다.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수호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시한 세상인데, 아무렴 어때요. -그렇지만 꼭 잡아주길 바라는 눈이잖아. 내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있다면, -아, 눈치 되게 빠르네....... -그러니까 옥상 난간에서 얼른 내려와. 혹은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려는 거라면, -비류야!! -아아, 바람이 시원한데. 형, 여기 와 볼래요? 나는 그때 흔한 사춘기적 우울함이 극에 달해 있었고, 당신은 그저 때맞춰 있어주었을 뿐이었지만, -싫어! -겁쟁이.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그런 걸지도. .........너도 그렇게 시시했겠지, 권화인. ---------------------------------------------------------- “비 오는데 나오는 게 아니었어.” “아니면, 뭐 집에서 할 거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수호형은 곤란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우산을 고쳐 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가 지금 장면을 본다면-하다못해 하룻밤을 나와함께 보내본 적이 있는 상대라면-내 배려심에 경의를 표했으련만! 저 폭이 작은 발걸음에 맞추려니 인내심 없는 나로선 미칠 노릇. “어디 갈 건데?” “영화 보러요.” “.................”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비류야, 애쓰지 마.” “...................” “나는 아무래도 좋은데, 영화 같은 거 이제 와서 새삼 보고 싶지도 않고.” “..............영화 좋아하잖아요.” “갑자기 즐기는 문화생활이라니, 풋,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비에 젖은 눈이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망연하게 예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무슨 영화가 좋았느니 하던, 오래 전의 눈동자를. “그거 알아요? 형 무지 착한척하고 얌전한 척 하는 거. 80년대 내숭도 형만큼은 아니었겠어. 한번씩 벗겨서 확인하고 싶어질 정도로, 버진이래도 믿을 거야.” “....................” “그럴 필요 없잖아요. 지금부터 영화든 뭐든 좋아하는 거 하면 되잖아요. 뭐든 빼고, 사양하고, 평생 그렇게 살래요?” “.......................” “잘살 수 있어요, 형.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나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놓고, 너 떠날 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고?” 수호형은 나를 보지 않았다. 담담하게, 눈물은 흘렀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우는 사람이었던가. 깨물어서 부은 입술을 작게 떨면서. “........나는, 자다가도 깰 만큼 기쁘지만, 네가 와준 게 믿을 수 없지만...” “................” “하지만 가끔은.......차라리 오지 말지, 그래. 너는 참 착해서, 혹시라도 더 오래 있어주길 바라면서 나는 더 불쌍해 보이고 싶고......뭐든 버거워서 사양해야겠고.....하지만 어차피 떠날 거, 어제 오늘 많이 행복하면서 또 불안하니까. 그거 아니? 너야말로 잔인해.” “...........................” “.......뭘 확인하고 싶어서 온 거니, 비류야....” 2살이란 나이차는, 이 둔해 보이는 사람에게서도 느끼게 되는 것. “..........젠장..........형.....” “....형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 변한 너는, 나한테 존대하는 타입은 아닐 테니까.”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쳇, 여전히 눈치가 빠르다, 연수호.” “응, 훨씬 낫다, 비류야.” 그는 쿡쿡거리면서 웃었다. 고개를 숙이면서, 여전히 표정은 감춘채로. “.......그....친구들.......영향이구나.......” “아아.” “............잘.....지내지, 네 친구들...” “.............” 적어도 그중 한 놈은 이제 괜찮지 않겠지. 나는 돌조각 같은 소계원의 표정을 떠올리며 입술을 뒤틀었다. 덕분에 연수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 자신 있냐.” “........무슨.......” “아니면, 아까 같은 투정은 말아달라고. 들고튀는 수가 있으니까.” 나는 연수호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쓰게 웃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오른 팔이 아파왔다. 볼을 붉게 물들이는 연수호의 머리에서, 옅은 샴푸냄새가 났다. 비는 그날 내내 땅을 적시고 있었다. ------------------------------------------------------------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표시준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입가에 의외의 일에 대한 만족감이 어렸다. G.K 그룹이 주룡회에 접선해오다니! 그것도 사천회의 견제를 목적으로! “형님, 방금 그 전화는 큰형님께서?” “크크크, 이 표시준이 한낱 남창 덕을 볼 줄이야! 자금줄로 G.K만 묶어놓으면, 사천회 아가리 틀어쥐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크크큭.” 표시준은 턱을 쓸며 크게 웃었다. 그의 오른팔 멀대는 눈만 휘둥그렇게 굴리고 있었다. 하기야 사천회와 G.K의 공생관계야 유명하다만. 이 세계에 어디 3년 넘는 의리가 있더냐. “형님, 그래서 도대체......” “야, 당장 연수호 놈 잡아들여! 일이 한결 쉽겠다. 큭, 언제고 주룡회가 사천회를 내리누를 날이 올 줄 알았어!!” “형님, G.K 그룹이 사천회에게서 등을 돌렸단 말입니까?” “이런 좆같이 둔한 새끼, 듣고도 몰라?!” 표시준은 자신의 좋은 기분을 망치는 멀대에게 악을 썼다. 큰형님의 전화를 받고 꿈결을 걷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하지만 정작 멀대는 안색을 굳히고 재차 물었다. “......함정 아닙니까?” “큰형님 전화였다, 씨발 새끼야! 당장 안 튀어나가?! 그 남창새끼 잡아오란 말이야!!” 멀대는 전화기로 뒷머리를 얻어맞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의 뇌리엔 ‘전쟁’이라는 공포스런 단어만이 떠돌고 있었다. ----------------------------------------------------------- “피어싱 뺄 때부터 알아봤지만, 니가 얻어터지고 올 이유가 도대체 뭐냐.” “닥쳐, 정충기!”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는 정충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비에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털면서 욕을 읊조렸다. 씨발 새끼들, 씨발 한비류!! “그 얼굴 큰 형이나 다른 가족들 앞에서 내보이지마라.” “미친, 의사 놈이 다친 놈 치료할 생각은 않고, 뭐야!!” “경고했는데 튀어나간 놈이 누구냐.” 정충기가 혀를 차면서 탁자위에 놓아둔 구급상자에서 솜과 소독약을 꺼내들었다. 나는 부어오른 왼쪽 볼을 두드리면서 탁자 앞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호오, 니 놈이 터지고 오는 건 오랜만인데.” “미친, 누가 터져!! 그 두 놈은 더해!” “쯧,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거다. 넌 그냥 구경이나 하다 오면 되는 거 아니었던가.” 볼에 느껴지는 따끔따끔함에 나는 눈썹을 찌푸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화인이 놈이 처음 주먹을 쥐었을 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해결이 난다면, 계원이 새끼야 다리가 부러져도 상관할 바 아니고. “......그래, 해결은 난거냐.” “................씹, 같은 바닥도 아닌 놈들이 뭘로 싸우려고!” “정충두, 이 바닥은 다 똑같다. 돈이 힘이고, 힘이 돈이야.” “미친!” “다시 경고하지만, 끼어들 생각 마라. 오지랖에도, 정도가 있는 거다.” 정충기가 무테안경 안의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마지막에 그 빌어먹을 화인이 새끼가 계원이 놈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은 건, 미처 방어도 못했던 계원이 놈이 되려 뭐 씹은 표정이 된 건, 그리고 늘 짓던 웃음 한 조각 실리지 않은 얼굴이 뜻하는 게 뭐라는 정도는. 빌어먹을, 10년이 넘었지만 녀석의 무표정에는 계원이 놈도 나도 본능적으로 움찔해버리는 것. “....비류새끼 돌아오면 내가 족쇄라도 채우고 만다!!” “.........그러니까, 참견하지 말라니까.....” 정충기가 내 얼굴에 밴드를 붙이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 “대학은 어디 갈 거야?” 영화 보러 가겠단 계획은 사라지고 빗길을 그저 걸으면서, 우리는 그제야 해야 했던 얘기를 시작했다. 문제는, 대학에 관한 얘기라면 유감스럽게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만. “수능 거의 바닥이유. 대학은 머리 좋은 놈들만 가면 되는 거니까.” “나는 늘 네가 머리 좋다고 생각했는데.” “형은 점수가 후하니까. 우리 부모님은 나 때문에 자신들의 유전자를 의심할 지경이었거든.” “너는 일부러 아는 문제도 틀릴 정도로 심술 맞고.” 수호형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나는 피식 따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학은, 처음부터 갈 생각 없었어. 나같이 머리 빈 놈들이야, 멀쩡한 몸 놀리며 살면 되는 거지.” “........많이 남자다워졌구나.” “아아, 새삼 반했어?” “...........능글맞아졌고.” 수호형이 눈을 흘겼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음을 흘렸다. 5년 동안의 변화라면, 그거로군. 남자다워진 것과 능글맞아진 것.(크큭.) “다른 애들도.......이렇게 변했니?” “다른 애들?” “아, 아니. 나만 그대로구나 해서.” 마른 손을 휘저으며 수호형이 말했다. 나는 형이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5년 전에, 아버지가 뺑소니차에 돌아가시면서는 내 시간이 멈췄어. 아버지 사업은 순식간에 빚이 되서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는데, 내 꼴이 이런 걸 보면 다들 거기서 거기겠지.” 그는, 물어보지 않은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것처럼. “흐릿한 기억이 많아, 5년간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는 게, 스스로 잊어버리고.....그렇게 살아버린 거지.” 수호형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을 참기 위한 행동이란 것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형을 보면 느껴졌던 이질감은, 순수했던 환영 속에서 살아온 자의 것이었나. 그렇게나 예전 기억을 놓지 못하고, 기억 속에 새로운 의미만 되새기면서. 어쩌면 이미 그의 기억 속의 나는 실제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오래 살았다고 생각해? 살날이 훨씬 많은 인간이, 별 소릴 다하는군.” “응. 다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말을 하는 수호형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먼 곳을 회상하는 눈동자를 나는 그제야 인정했다. 다른 곳에 있구나, 그 사람. 적어도 형의 기억에만 의존해야 할 만큼, 멀리 있는 사람이구나. “..........암튼 사기당한 거 맞잖아, 나.” “응?”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짐짓 화난 척, 얼굴을 굳혀 보였다. 수호형의 얼굴이 조금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정도인 거지? 그 사람하고는 다른 거지?” “..............뭐?”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옛날에 형을 좋아했던 내가 생각난 거뿐이잖아. 그걸 착각하고 싶어 했던 거고.” “..................아니...” “형이 정말 잡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인 거잖아. 자꾸 나한테 사기 칠래?” 내가 엄하게 묻자 수호형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둔탱이가 어디가나, 연수호. “............그런........거니...?” “.........응......” “..............나.....아직도 그 사람........못 잊는 거니?” “...........아마......” “......그런데, 그걸 니가.............어떻게 알아......?” 수호형은 조용히 울면서 물었다. 이렇게 조용히 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나는 그냥 형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형이.........내 첫사랑이니까........” “.........응응...........고마워, 비류야.........” 형의 눈물을 내 반팔 셔츠가 소리 없이 받아내는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지,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지. 아니, 왜 이렇게 형의 작은 등을 토닥여주기만 해야 할 것 같은지. 차갑게 떨어지는 비가, 왜 새삼 고마운 건지. ------------------------------------------------------------ 얼마나 오래 망설이고 건넨 말인지,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내민 걸음인지, 혹은 얼마나 오래 사랑하고 아파한 마음인지, 너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결국 또 멍청히 혼자 내민 손만 거두지만. “.......어떻게 된 거냐?” “.............”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냐!” “...............” “........좋다. G.K의 늙은이가 제 손주 놈을 얼러서만 키우더니, 하룻강아지로 키워놨어.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꼴이지!” 아버지는 굳건한 얼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그저 소파에 앉아 입만 닫고 있었다. “계원아, 난 널 믿는다. 넌 사천회의 후계자야. 그런 놈 따위보다 훨씬 강하게 키웠다. 넌 내 아들이다!” 아버지의 마디 굵은 손이 탁자를 때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비에 젖어있던 환영이 눈을 뜬다. 냉막한 표정으로, 바로 나를 향해서. 후, 예상했던 일인건가. “졸업하면 바로 네가 이어가야할 사천회다. G.K라면 버거운 상대긴 해도, 움직이는 건 어차피 권승인이 아니라 권화인이야. 충분히 승산이 있다.” ..........사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네게는 무엇도 자신할 수 없다는 걸, 나는 매번 잊지만, 너를 잃는 대가를 치르기엔, ..............10년은 너무 이르다........ “...........이번 일......모두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자신 있느냐. 상대는, 권화인이다.” 아버지는 권화인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집안들 간의 모임에도, 권화인은 언제나 제대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건, G.K그룹의 둘째 손주로서의 권화인과... 현재 G.K의 실세 권승인의 하나뿐인 동생으로서의 권화인. “........젊은 놈이 여간 약은 게 아니거든, 그 권승인이. 권화인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피가 걸리긴 하구나.” 아버지는 턱수염을 쓸면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나이가 들면 호랑이도 감이 무뎌진다더니, 범과 이리도 구별 못하는 건가. 하기야, 어차피 상대는 나다. “.......노파심이지만, 사정은 봐주지 않겠지? 이 세계에선 등을 돌리면 다 적이다.” “..................” 손을 내미는 놈 가슴에 칼을 꽂는 것보다, 내 목을 쥐는 그 놈 손가락을 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큭, 어차피 물어뜯을 영광 같은 건 애초에 주지도 않겠지만. ------------------------------------------------------------ “아니, 우리 막내 얼굴이 왜 이러니?!” 제기랄, 된통 걸렸다. 나는 냉장고에 고개만 집어넣은 자세에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비명 지를 자세를 취했다. 나는 서둘러 귀부터 막았다. 물론 온갖 욕을 읊어대면서. “어머나!! 여보, 아버님!! 큰애야, 둘째야!!!” 째지는 비명소리에 집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발소리. 이건 거의 공포다, 씨발. “우리 충두가!! 우리 충두가!!” 거의 뒤로 넘어가는 엄마를 부축한 건 제일 빨리 달려온 아버지. 나는 잠자코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배고픔을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참아야 되리란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집구석 같으니! “세상에, 충두야!! 이게 어쩐 일이냐!!” “.....으으, 누가 우리 금지옥엽에게!!” 할아버지의 흰 턱수염이 노여움으로 흔들렸지만, 그건 예의 있는 일. 나는 이번에는 얼굴을 심각하게 굳힌 아버지와 큰 형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이야, 호들갑일 뿐이지만 이 인간들은 좀 심각하다. “........누구냐.” 단호하게 묻는 것 좀 보라지. 무슨 일인지보다 누구냐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게 정상인가. 씨발, 내가 달 거 안 달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씹, 사내새끼가 주먹질 좀 할 수 있는 거지, 호들갑 좀 떨지 마!” “정충두!!” 큰형이 그 험악한 인상을 굳혔다. 하지만 여기서 굽히면 개지랄로 유명한 내 성질머리가 운다. 쪽팔리게 이 인간들은 늘 복수한다고 나댄다고. “........비류 찾아주면 누가 이랬는지 말할게.” “정충두!!” 내 말에 소리치는 정충기. 나는 둘째형을 노려보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류라면.........?” “....큰애야, 난 우리 막내가 맞고 다니는 꼴 못봐. 비류라는 애, 꼭 좀 찾아주렴.” 나왔다. 엄마의 눈물 글썽 공격. 큰 형은 얼굴을 굳히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와라.” “엄마, 땡큐.” 나는 여전히 휘청거리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면서 큰형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이거야, 너무 늦게들 다니시는 거 아닌가?” 수호형의 대문이 보이는 골목을 돌자 한 무리의 인영이 우리를 에워쌌다. 불량스러워 보이는 폼이, 누구냐는 진부한 대사를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 더구나 내 소매를 말아 쥔 수호형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 나는 무리의 수를 가늠하면서 계원이 놈에게 이를 갈았다. 잘 처리해달라고 했더니! 보기에도 건장한 떡대들이 열명 남짓. 더구나 손에는 모두 하나씩 몽둥이를 들고 있다. 순순히 잡혀가줄 생각도 없지만, 이건 너무 많은걸. “.........상대를 잘못 짚은 거 같은데. 나와는 안면식도 없고.” “야, 너 옆구리에 단 게 남창인 거 모르냐? 그놈 넘기고 꺼져.” 역시 노리는 건 수호형이었나. 하지만 굳이 남창 하나 때문에 이렇게 몰려드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등으로 느껴지는 수호형의 긴장을 가늠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작은 손이 내 손안에서 울고 있다. “그렇게도 받아주는 여자가 없냐? 여기 이놈은 새끈하게 빠진 몸도 아니구만.” “미친! 야, 저것도 밟아!” 무리중 하나가 외치자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놀려 한 놈의 턱을 올려 찼다. 뒤로 넘어가는 덩치 뒤로 또 한놈이 달려들었다. 녀석을 상대하느라 수호형이 내게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퍽. 순식간에 나타난 인영이 수호형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빠르게 스러지는 작은 몸. “씨발!!” 바닥에 널부러진 수호형을 보던 시야가 캄캄해졌다. 머리에 둔탁한 통증을 느낀 건, 의식을 잃기 조금 전이었다. -..........아폴론처럼 생겼구나, 저 애. -아폴론? 그게 뭐예요? -풋, 가장 아름다운 신이야. 아버지를 닮아 강력한 신이기도 하고 소문난 바람둥이이기도 해. 수많은 신과 인간들에게 버림받는 아픔을 준 잔혹한 신이야. -그러니까, 난봉꾼이란 건가? 킥, 딱이네. 저 녀석, 정말 그렇거든요. -버림받는 결말로 끝나지 않은 얼마 되지 않는 인물 중 하나인, 히아킨토스. 죽음으로 끝을 맺었으니,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아? -글쎄, 저 놈이라면 죽어버리면 깨끗이 잊어버릴 텐데. “......류야........비류야....!!” 나는 나를 흔드는 손에 오래전의 꿈에서 벗어났다. 그 기억은........ “.......으으, 머리 울리니까 흔들지 마.” “잠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여긴 주룡회잖아....” 수호형이 내 소매를 꼭 쥐고 말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다. 변했다고는 해도, 이런 점은 그대로인 건가.... “.....꼭 돼지우리 같은 곳에 처박아 놨군.” 나는 빛이 문틈으로 조금 새어 들어오는 창고 같은 곳을 둘러보면서 투덜거렸다. 수호형은 내 옷을 놓을 생각도 없는 듯이 내게 몸을 붙여 왔다. 이거야, 정말 황당할 노릇이로군.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초조해졌다. 왜 수호형을 나와 같은 곳에 감금시킨 걸까. 쿵.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불안감. .......그 녀석은 지금 이곳에 없어.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무슨...” “미안.......너까지 끌어들여서. 내가 말해서.........너는 어떻게 해볼게, 비류야..” “.........큭, 남창 말 잘도 들어주겠네.” “....뭐?!”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어느 놈인지, 형 뒷구멍 맛이 그리워서 잡아온 거 같진 않으니까.” 내 싸늘한 말에 형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저 못 말릴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어떻게 5년을 구르고도 모를까. 이 바닥을. 나는 어둠 속에서 의미도 없는 눈을 감았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얼마 후에, 문이 열리리란 것을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 표시준은 잔인한 사내였다. 물갈이가 쉬운 이 바닥에서도 그의 아래에서 1년을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휘하에게 마저 지나치게 잔인한 사내가 바로 표시준이었다. 멀대는 연수호를 기억했다. 화장실 구석에서, 복도의 구석에서, 혹은 집회실의 탁자 아래에서.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모습으로, 하의는 늘 거의 벗겨진 채로. 키우는 개만도 못했지만, 표시준에게는 그러한 상대가 많았다. 남창으로서는 기술도, 매력도 없는 그 살덩어리를 표시준이 그토록 오래 끼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마 잊혀진 것이라고 멀대는 생각했다. 뻔히 눈에 보였지만, 화병이나 걸려있는 그림처럼. 멀대에게도 그저 더러운 무기질로만 보였다. 언제나 흐릿한 빛만 깜박거리던 검은 눈. 생기 없이 처진 표정. ....멀대가 기억하는 연수호였다. 끼익. “......크큭, 오랜만인데, 연수호?” 문을 열고 들어선 표시준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멀대는 순간 어둠 속에서 뭔가를 보았다. 떨리고 있는 검은 눈동자. 공포에 젖어있는 절망감. 그가 기억하고 있는 눈이 아니라는 사실에 멀대는 순간 분노를 느꼈다. “......손님 대접이 영 엉망인데.” “.......?!” “...........말투는 더 고약하고.” “비, 비류야.....”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한껏 얼굴 근육을 뒤틀고 있는 녀석. 얇은 반팔 티 아래로 단련된 근육들이 보인다. 멀대는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었지만 어려보이는 녀석은 뒷벽에 기대앉은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인 것은, 표시준이었다. 퍽. “큭..!!” 내장이 찢겨나가는 기분일거라고 멀대는 멍하니 생각했다. 구둣발이 박힌 녀석의 배는, 뒷벽이 가로막힌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해내야만 했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숙이는 녀석의 정수리를 표시준의 흙 묻은 구두가 내리눌렀다. “......큭....개자식......대뜸 발을 놀리는 건 누구랑 똑같군.....” “.........호오, 아직도 입만 살았냐?” 퍽. 뚜둑. 녀석의 허리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바닥에 짓눌린 채로 참 겁이 없는 놈이었다. 멀대는 휘하에게 손짓해 자신과 표시준 외에는 모두 나가게 했다. 아직 어려보이는 녀석에게마저 잔인해지는 상관의 모습을 보여줘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가뜩이나 아랫놈들 마음을 못 얻고 있는 판에. “윽.......!” “알겠냐, 애송이. 나 같은 놈을 만나면 그냥 기는 거다.” “.....크크....네놈한테 기었다가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하라고.....” “......확실히 머리 좋은 놈은 아니구나.” 표시준이 구두굽으로 어린놈의 등을 찍었을 때, 연수호가 달려들어 표시준의 다리를 잡았다. “..그, 그만해요...!!” 부들부들 떨리는 뼈만 앙상한 손이 표시준의 양복바지에 닿자, 황당한 표정을 짓던 표시준의 얼굴에 경멸과 분노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씹, 빌어먹을 남창 새끼가!! 이게 얼마짜리 옷인 줄 알아?!! 그 더러운 좆이나 만지던 손으로 어딜!!!” 퍽. 퍽. 퍽. 익숙한 광경이라고 멀대는 생각했다. 피가 튀고 익숙한 타격음이 들리는 동안, 멀대는 그러나 다시없이 혼란스러웠다. 어째서.....무기질 인형 따위가 움직인 거지.......? “씹!!” 어린놈이 주먹으로 표시준의 복부를 쳤다. 갑작스런 고통에 표시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연수호는 맞던 자세 그대로, 어린 녀석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우억!!” 어린 녀석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몸을 구부린 표시준의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쩍 입을 벌린 표시준의 입에서 투명한 타액이 흘렀다. 멀대는 그러나 말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계속되는 분노와 당치않은 배신감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탁. 그러나 표시준이라면, 실력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내였다. 딱딱한 구두굽이 녀석의 발등을 찍는 순간 전세는 역전되었다. 뒷 세계에서 구르던 주먹은, 애송이들의 솜방망이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 퍽. 퍽. 퍽. “........형님, 사천회를 치기 위해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씨발, 뭐?!” “...................그놈은 제가 알아서 손을 봐 놓겠습니다.” “......좆같은........” 표시준은 녀석을 밟던 발을 내리고 숨을 골랐다. 흐트러진 넥타이가 등 뒤로 돌아가 있다. “.........저 놈, 알아서 처리해.” “.................저 녀석을........말입니까?” “....크크, 저 면상 부숴버리란 말이야.” 표시준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앞서 나갔다. 멀대는 아무말없이 거의 널부러져 있는 어린 녀석을 내려다봤다. “......비.....비류야.........” “............씹...” 녀석에게 다가가는 비틀어진 살덩이. ......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적 없던. “.......깔겠다고 나설 놈이 있을지....” 멀대의 말을 들은 연수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멀대는 입가에 조소를 띠운 채로 그 어둠 속을 빠져나왔다. ------------------------------------------------------------------------------------ “......그 놈이....요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차를 들면서 권태수회장이 음미하듯 늙은 눈을 내리깔았다. 권승인은 마주 찻잔을 들면서 그저 슬쩍 웃어보였을 뿐이다. “............후, 너나 그 놈이나 속을 알 수 없기가 똑같구나.” “...피가 어딜 가겠습니까.” “끌끌끌.” 권태수회장은 호탈하게 웃으며 흰 수염을 매만졌다. 얼굴의 주름은 태산 같은 그의 기백을 다 지우지 못했다. “사천회만이 문제가 아니야. G.K에는 너희 형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후후......” “........나는 자손이 많은 사람이다. 네 큰 아비도 그렇고, 내가 약하게 키운 놈들이 아냐.”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는 뛰어난 분들이시죠.” “.....끌끌, G.K를 집어 삼킬 생각이라면, 어차피 너 혼자선 무리일 터. 이번 일로 화인이 놈 역량을 알게 되겠구나.” “...............저희 형제는 아직 어립니다.” “쯧쯧, 친족들 간에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거라.” “할아버님다운 말씀이 아니시군요.” 권승인은 눈을 휘면서 입을 열었다. 권태수회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승냥이 새끼들 무리에, 어찌 제 형제들만 범들일꼬. “.......그래서, 화인이 놈을 움직인 그 비류란 아이는..?” “.........................글쎄요.” “.........일이 일단락되면, 한번 보고 싶구나.” “....좋으실 대로.” 권승인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왕이 될 놈이야. 권태수 회장은 이미 식어버린 차를 다시 들었다. ----------------------------------------------------------- “....G.K가 빠르게 세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주룡회 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들도...” “........걱정해야할 건 전면전이 아니다. 주먹 들고 싸우는 거야, 어차피 천직이니까.” “....그럼..?” “주류 시장을 알아봐. 유통업자들 틀어쥐는 거야, 그놈에겐 식은 죽 먹기니까.” “.........!!” “서둘러야 한두 군데라도 잡을 수 있을 거다.” “..네, 네!!” 소계원은 이틀째 한숨도 못잔 피곤한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비볐다. 예상은 가지만, 막을 수 없는 일. 혹은 예상도 가지 않을 일. 생각해야 할 게 끝도 없었다. 신경 쓰지 않던 세세한 납기일도 언제 눈덩이처럼 불려서 터뜨릴지 알 수가 없으니. 되도록 다 처리해 버리는 수밖에. -어리석다. 소계원은 어젯밤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 따윈, 없다.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권화인의 눈을 막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까지는, 한비류를 내어 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오기, 혹은 질투라고 소계원은 스스로 조소했다. 녀석이 제 발로 나타나기 까지는, 내 입으로 약속한 시간이 되기까지는. -사천회의 공중분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시나리오지. 사천회가 운으로 터를 잡고 지하의 머리 노릇을 해온 게 아닌 이상. -..........혹은 영원히 권화인을 잃게 되는 것. 소계원의 팔에 푸른 심줄이 돋아났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은 소름끼치게 냉정했다. “......싸움에 이기면, 녀석을 가질 수도 있지.” 매혹적인 유혹이로군. -어리석군.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지 마라. 소계원은 머릿속 소리를 무시했다. 처음으로, 욕망이 이성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 표시준은 자신이 밟아놓았던 애송이에게 흥미가 생기고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욕을 하던 놈도 처음이었고, 밟히면서도 비굴해지지 않는 면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은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요즘에는 알아서 설설 기는 것뿐이라, 되려 재미가 없기도 했던 것이다. 큰형님의 부름에 달려가는 차 안에서 표시준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오랜만에 발견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멀대 새끼가 너무 손을 봐서 못쓰게 되면 안되는데. 그런 스타일은, 레이프엔 여지없이 약할 테니까. 뭐, 남성적 자존심이 센 놈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이지. “야, 멀대 한테 전화 때려봐.” “........안받는 데요.” “행동하난 빠른 새끼.” 그는 되려 멀대를 욕하면서 20층 상당의 빌딩이 다가오자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생기기에도 야비하게 생긴 얼굴을 굳혔다. 직접 부를 정도라면, 큰 껀수일 텐데. 그의 반짝이는 검은 구두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사무실안엔 이미 손님이 와 있었다. 표시준은 본능적으로 한기를 느꼈다. 뒷바닥에서 굴러온 그의 육감이, 찌르르 아프게 울렸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엄한 큰형님과 아직 스물도 안된 듯한 애송이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그의 큰형님은 마땅히 어려워할 사람이다. 한치의 틀림없이 엄격한 사람이라, 그도 몇 번 곤혹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저 애송이 쪽인가? 낯선 인물을 훑는 표시준의 조심스런 시선이 감탄으로 변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물건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의 생애에 저리 생긴 놈은 본 적이 없었다. “G.K 쪽에서 오셨다. 인사 드리거라.” “........네?” 그가 되물은 것은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그의 큰형님은 커다란 무례라도 저지른 듯이 얼굴을 붉혔다. 정작 어디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잘생긴 조각상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슬쩍 일별했을 뿐이다. “.....표..표시준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워낙 배운 거 없는 놈이라. 이 바닥이 워낙에 그렇지만.” “........한번만 더 불쾌한 시선을 던지면, 재밌어 지겠는데.” 감정 없이 싸늘한 미소를 표시준이 행여나 본 적이 있대도, 어쨌든 저만은 못하리라. 낯선 손님은 낮은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흘렸다. 상당히 낮은, 저음이었다. “..........이런..오해는 푸시고......대사를 앞두고 이래서야...” 큰형님이 이마에 번들거리는 땀까지 흘리며 당황해하자 표시준은 경악했다. 저 냉정하기로 유명한 큰형님이! 사천회의 압박에도 주룡회를 이렇게나 키워온 큰형님이! “..........크큭, 뭐, 좋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입가를 비트는 미소를 흘리며 낯선 손님이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에 살의가 스쳤다고, 표시준은 언뜻 생각했다. “....그, 그렇다면.........내일........” 낯선 자는 소파에 거만하게 기댄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 표시준이 취해있을 때, 큰 형님이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권화인...뭘 위해 움직이는지는 몰라도, 너무 꺼림직한 상대야.” 하지만 표시준이 보기에, 큰형님은 이미 사천회를 누른 듯한 성취감에 취해있었다. 권화인이란 녀석은, 그런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형님, 제가 소계원의 미끼가 될만한 녀석을.......” “..뭐?” “...........그러니까 일전에 말씀드린 그 남창이......” “................미친 새끼.” 큰형님은 더 들어볼 생각도 않고 얼굴을 구겼다. 천하의 사천회 후계라는 놈을, 뭐, 남창으로 꼬여내겠다고? “내일 사천회를 칠 생각이나 해!” 표시준은 더 입을 열려다 비난의 화살만 받고 말았다. ------------------------------------------------------------ “.......이틀......” 권화인은 검은 세단에 몸을 실으며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이틀이었을 뿐이다. 그는 눈을 감은채로 쓰게 웃었다. 사흘째 잠들지 못한 눈꺼풀이 뻑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권화인은 당분간 잠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질리게 피곤한 녀석. -화인아, 나는 언제나 네 친구다. ..........한비류.. -씨발, 고마운 친구자식이라고! ..............한비류..... -나 찾으려고 하지 마라. ....................도망가기엔... -우리 그냥 이렇게 살자. .........10년은 늦었다는 걸... “........빌어먹을.” 적어도 멀쩡히 돌아와야 할 거다. 소계원이든, 정충두든, 너를 움직이게 할 녀석들이 내 곁에 있는 이상에는. -.......사랑해... 큭, 그래, 네 거짓말을 내가 아직 기억하는 동안에는. 그 거짓말에 아직도, 내 썩은 심장이 뛰는 동안에는. 그리고 여전히, 네발로 내게 오길 내가 바라고 있는 동안에는. ------------------------------------------------------------- 쾅. 철문이 거슬리는 소리로 울었다. 여기 대가린지 뭔지가 신나게 나를 밟던 이후로, 나는 독방인지 뭔지로 끌려와있었다. 하기야, 연수호가 내 옆에 없다는 것만 빼면 달라질 거 없는 상황인가. 나는 문득 담배가 절실해졌다. 담배를 배운 건 중3때. 흔치않게 패싸움으로 번졌던 싸움......후였던가. 쪽수로 상당히 밀렸던 싸움이었기 때문에, 물론 쌈귀신인 계원이 놈이나 화인이 놈이 있는 이상 질리는 없었지만 꽤나 힘든 패싸움(푸하)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결국 상대 일진놈들이 당치않게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 걸 우리쪽 놈들이 뒤쫒기 시작하자 나는 결국 숨을 몰아쉬며 공터에 주저앉아 버렸다. 상대 일진의 대가리를 집요하게 뒤쫒으며 쌍소리를 날려대는 충두놈이 멀리서 보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 대가리가 불쌍해졌으나, 각설하고. 공터에 남아있는 건 나와 화인이 놈과 계원이 놈이 다였다. 그 유치한 놀이가 내 훈련 명목으로 시작된 이상, 이 미친놈들에겐 도망가는 놈들까지 족치기엔 귀찮았을 터였고, 충두 놈도 평소엔 저리 튀어나가지 않았을 테지만 싸움이 붙기 전에 그쪽 대가리가 좀 실수를 한 탓이었다. 감히 충두에게 비위 상하는 추파와 농도 짙은 ‘쮸’를 날렸으니, 충두 놈 성질에 돌아버리는 게 당연. “....헉헉, 야, 충두 놈 벌써 안보인다......” “..............저 녀석, 좀 열 받았군.” “뭐?” 헉헉대며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내가 묻자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땀 한방울 안흘린 화인이 놈이 슬쩍 바닥에 떨어진 장초를 고갯짓했다. 계원이 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잠깐 끄덕였다. “........담배?” “아아, 충두 놈이 물고 있던 거. 그 무시무시한 ‘키스’가 날아오는 동안 뱉어버리더군.” “....................헉.” “....걱정마. 칼이 없으니 쉽게는 못죽일거다.” 여전히 무표정한 채로 입을 여는 계원이 놈. 낮게 큭큭거리는 화인이 놈. 나는 망연해져서 혀를 뺀 채로 뒤로 누워버렸다. 계원이 놈은 여전히 곧게 선채로 녀석이 입으면 정장처럼 보이는 교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바람이 녀석의 검은 머리를 날렸다. 단정한 얼굴이 흰 연기에 가려졌다. 녀석은 익숙한 몸짓으로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뱉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제기랄, 문득 나는 질투가 났다. “......야, 나도 한대 줘.” “.............” 소계원은 무표정에서 조금 눈을 크게 뜬 채로 날 내려다봤다. 나는 손을 녀석에게 내민 채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옆에서 화인이 놈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담배는 해롭다.” “알아, 임마. 그리고 그게 너한테 어울리는 말이냐.” 계원이 놈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도 그걸 느꼈는지 후, 하고 살짝 웃는다. 계원이 놈은 언제나 눈으로만 아주 잠깐씩 웃었다. “.............큭, 겉담배는 안돼.” 화인이 놈이 여전히 큭큭거리면서 나를 향해 담배를 던졌다. 나는 받아들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어느새 붉은 입술로 담배를 물고 있는 화인이 놈이, 한층 입가를 휘면서 말했다. “갑자기 왜 담배가 피고 싶은 거냐.” .......딱히 할말은 없다. 그냥 네놈들 다 피고 있고, 계원이 놈이 폼 잡는 데 꽤 어울리기도 해서. “........그러는 너는 왜 피냐.” “후, 키스하고 싶어서.” 녀석의 검은 눈이 숨막히게 깊어졌다. 계원이 놈은 말없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배는 중독된다. 내가 유일하게 끊을 수 없는 것. 나는 입 주위를 손으로 쓸면서 낮게 웃었다. 회상, 회상, 회상, 빌어먹을! 나는 기억 따위나 헤집으러 녀석에게서 도망 온 게 아니야! “........연수호.”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최초의 이름. 한비류의 첫사랑 감상치곤, 놀라울 정도야. 나는 누군가의 오랜 버릇처럼 쓰게 웃었다. 소계원, 안심해라. 역시 사랑은 아니더군. 두꺼운 철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쳇, 녀석에게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변명이 첫사랑이라니. 나 왕년에 날렸다는 카사노바 맞냐. 끼릭거리는 거슬리는 쇳소리.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비추자 눈이 부셨다. 빛에서 커다란 털로 덮힌 손이 들어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꼬마야, 니 고추 맛 좀 볼까?” 커다란 덩치는 마저 문으로 육중한 몸을 밀어 넣으며 웃었다. 철문은 다시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러나 덩치가 연 창문으로 이번엔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나는 입끝으로 조금 웃었다. .......이번엔 강간이라. 정말 재밌는 곳이지 않냐, 여기? 키가 190은 될듯한 덩치가 가슴의 털을 벅벅 긁으면서 걸음을 옮겨온다. 나는 여전히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에게 돌아갈까, 돌아가지 말까. 소계원, 너에게 나는 일주일을 약속했지만. 덩치의 손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덩치의 두꺼운 팔목을 잡아챘다. 덩치는 당황한 듯 하다. ........하지만 갇혀있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겠군. -------------------------------------------------------------- 달빛이 비춰들고 있다. 잠든 듯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빛이 떨어진다. 권승인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는 동생의 얼굴에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양귀비 같은 녀석. 감탄에서 쓴웃음으로, 그의 얼굴빛이 바뀐다. 보통 달콤한 독이 아니다, 그의 동생은. 권승인은 자신도 모르게 차갑고 흰 손을 동생의 얼굴을 향해 내민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그의 앞에 완벽한 조각상은 입을 열었다. “꺼져.” 조금의 표정변화 없이, 아름다운 주제에 또 한없이 서늘하게. 권승인은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아름다고 강인한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은 안목 있는 자들의 본능이지만, 불에 다가가지 않는 것은 짐승의 본능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것. 희랍의 선이 아름다운 예술품일지, 내 피를 나누어가진 호랑이일지. “며칠째 자지 않았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 아니던가?” “.....사천회를 치는 것이? 우습군.”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착각하지 마라, 그 녀석을 위해 휘두르라고 준 허용이 아니야. 너의 핏줄, 너의 능력, 그리고 이 G.K까지.” “.........크크크큭.” 권화인은 낮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제서야 긴 속눈썹을 들어 눈을 뜬다. 검은 눈은 여전히 무엇도 내보이지 않는다. “.......꺼지라고 했다.” 권승인의 앞덜미가 순식간에 채여졌다. 어느새 자신의 목덜미를 쥐고있는 아름답고 강인한 손에, 권승인은 순간 숨을 삼켰다. “......후, 좋도록. 내일은 기대하고 있다는 말 하려고 왔다.” “..............” 몸을 바로하며 권승인은 피식 웃었다. 그의 동생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 새벽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사천회 휘하의 지부는 이미 주룡회를 비롯한 몇 개의 거대한 세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들은 사천회의 중심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일선에서 지휘하고 있는 주룡회의 머리 주명준과 이번 늙은 늑대의 왕을 물어뜯는 일에 크게 신임을 얻은 표시준은 정확히 사천회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 사천회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고인 물이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사천회는 너무 거대하게 자라 손과 발도 잘 움직이지 못했다. 잔가지를 쳐내면서 나아가다 보면, 곧 기름만 잔뜩 낀 심장에 닿을 것이다. 사천회가 이렇게까지 쉽게 손가락을 잘린 것은, 강남지부의 손지경의 배신 때문이었다. 약속되어있던 시각에 집결한 주룡회와 다수의 세력들은, 순순히 정보를 주며 자신들을 돕는 사천회의 일각에 놀랐다. 손지경이라면, 사천회 내에서도 오래 뼈를 묻어온, 알아주는 실력자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현 후계인 소계원의 외가쪽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얻는 것이 더없이 든든한 일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주룡회의 주명준은 그의 배신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어제 자신을 찾아온 G,K의 인물을 떠올리곤 작게 공포섞인 감탄사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무서운 자였다. 조금도 생각 못했던 수를 써, 더없이 완벽하게 사천회를 뿌리부터 흔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주룡회가 그에겐 그다지 중요한 장기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제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주먹으로 정상에 오른, 아니 오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각목이 그의 시야로 날아들자 날카롭게 몸을 피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그에겐 이미 그 생각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머리보다 주먹을 쓰는 게 익숙했으며, 이제 명실공히 주룡회 제 2인자가 된 표시준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인 것이 서울 뿐만은 아니었지만, 사실 머리는 서울이었다. 그리고 주명준은 곧 그 중심의 늙은 왕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금 압박, 혹은 정치권의 개입... 주명준은 모든 것을 연계시킬 만큼 머리가 좋지는 못했다. 그는 사실 이제 뒷세계의 일인자가 되리라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어제 모든 것을 지시한 자가 보이지 않는 것에 잠깐 불안했으나, 정작 주먹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신들이었고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천회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쉬운건가! 20년 가까이 굴러먹으면서 그는 사천회의 두려움을 마음 속 깊이 묻고 살았다. 그들은 뒷세계의 신이었다. 그리고 또한 악마이기도 했다. 그가 주룡회를 제 2세력으로나마 키운 것도, 사천회의 묵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만큼 강했으며, 또한 오만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소름끼치는 비명과 타격음이, 적어도 근 10년 내에 이토록 무시무시했던 적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곧 모든 것은 정리될 것이었다. 주룡회와 다른 세력들은 거머리에게 조금씩 피를 빨리는 것처럼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사천회는 이제 제왕의 자리를 넘겨줘야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들은 자신의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피차 출혈이 큰 싸움이었다. 하지만 주명준이 막상 사천회의 중심에 다가섰을 때, 그를 맞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주명준씨.” 소계원! 사천회의 어린 후계였다. ------------------------------------------------------------- 헉헉. 땀은 턱을 따라 흘렀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근육이 감각도 없이 얼얼했다. 이런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헉헉.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게 창문으로 느껴졌다. 더운 숨결이 다리에 와 닿는다. 솔직히 소름끼쳐서 다리를 움직였다. 덩치는 얼굴이 뭉개진 채로 엎드려서 기절해있다. 그가 내뿜는 열기는 좁은 창고 안을 더욱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씨발, 더럽게 힘 센 놈들 같으니라고! 내 온몸엔 여러개의 멍과 타박상이 들어 있었다. 잡혔던 손목은 아주 검을 정도다. 세명째. 나는 이젠 거의 흐릿한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생각했다. 190은 기본으로 넘는, 더구나 나같은 놈을 덮치려고 달려드는 덩치를 세명이나 상대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어째 힘만 세고 요령 없는 녀석들만 차례로 들어와서 이정도지, 제대로 된 놈 하나만 들어왔어도 난 바닥에 엉덩이 까고 죽어있을 거다. 제기랄. 끼익. 흠칫.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놀랐다. 이번엔 절대 무리다. 솔직히 한계다. 온통 땀이 줄줄 흐르는 몸은 조금도 움직여주질 않는다. “..........놀랍군.” 그는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내였다. 처음 끌려와서 어떤 개 같은 놈에게-그놈이 이런 짓을 시켰을 게 분명했다- 맞고 있을 때, 유일하게 옆에 남아있던 놈이었다. 나는 그가 이일의 감독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만으론 여지껏 들어온 덩치보다도 크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암담하게 물었다. “............이번엔 너냐.” “..................” “.....진작 좀 들어오지. 앞의 놈들은 하나같이 깔 마음도 안들더란 말이지.” “.......재밌는 말을 하는군.” “...............이봐, 내가 지금 좀 힘들어서 그러는데 전희는 생략해도 될까.” 그 멀대같은 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기절해있는 덩치를 보더니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다. “...........한비류군.” 녀석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마자 날라온 것은 주먹이었다. 나는 고개가 돌아가고 뇌가 울리는 한참 후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입가에는 말라붙은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턱을 따라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하지만 나는 공격은 물론이고 몸을 웅크려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지쳐있었다. 이거야 후장파열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골로 갈수도 있겠다. “.......어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퍽. “헉........끄으.......ㄱ” 배를 누르고 있는 거친 발 덕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내가 바둥거리며 놈의 구두를 밀쳐내려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고통스러웠다. 머리에 구토가 올라올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리석은 건 죽어도 할 말 없는 죄야.......알겠나?” 내 숨이 거의 넘어가고 얼굴이 붉어졌다 거의 검어지려할 때 그는 내 가슴에서 발을 떼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숨을 내뱉으며 몇 번 헛구역질을 했다. 납작해졌던 폐에 고통스러운 공기가 채워졌다. “......그런 만용이.........녀석을 변하게 했나..” 나는 콜록거리느라 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어서 빨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들게 기침을 하는 내 목을 다시 잡아온 건 놈의 뼈가 굵은 손가락이었다. 놈의 손가락에는 서서히, 가차 없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냉정한 척하던 얼굴에 살의와 광기가 빛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놈의 얼굴을 밀어내려했지만 그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이제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왜 이놈에게 이런 증오를 얻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정신은 의식의 깊은 곳으로 침몰해갔다. 마침내 의식이 아득하게 끊어지려는 순간, 내 정신없는 귓가에 나를 부르는 톤이 높이 목소리가 들렸다. -------------------------------------------------------------- “대체 비류새끼는 언제 찾는데?! 계원이 놈 죽어나자빠진 다음에?!!” “........정충두.” 정치계의 거물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둔 정씨가문의 첫째, 정충현은 엄한 목소리로 막내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실은 자신까지 지나치게 제멋대로 키운 탓에 말투도 말투지만 성격까지 나빠진 게 바로 그의 동생 정충두였다. “그러게 처음부터 개입하지 말라지 않았습니까.” 둘째인 정충기가 무테안경을 벗어 자신의 흰 의사 가운 앞주머니에 끼우며 들어왔다. “........휴, 너는 또 왜 집에 온 거냐. 차라리 병원 문을 닫아라.” “이게 다 형이 저 녀석을 멋대로 키운 탓입니다. 이번 일은 위험해요.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정충기!! 씹, 너나 끼어들지 마!” “정충두!!” 정충현은 머리를 짚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정말 그녀석이 움직이고 있나?” “........그러니까 위험하다는 겁니다.” “.....권화인이라...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고양이인 줄 알았지.” “하하, 권승인의 동생이 고양이라고요?” 정충현은 정충기를 따라 마주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집안에서 너희를 뭐라는 줄 아는 거냐?” “.......니미, 지금 논점이 그게 아니잖아, 씨발!” “너랑 권화인, 소계원 모두 너무 발톱을 숨기고 살았다. 본성은 안그런 놈들이, 승냥이새끼들에게도 비웃음 당하고 있는 건 기분 나쁜 일이지.” “...........충두는 아닙니다. 그 녀석들은 질이 다릅니다.” 정충현의 말에 정충기가 샤프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충현은 큰형답게 온화한 표정으로 웃었다. “내 생각엔, 네가 제 동생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정충두, 한비류는 찾고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찾아도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권화인이 사천회를 치는 건 한비류를 내놓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 것을 맘대로 빼간 데 대한 값을 하는 것뿐이니까.” “한비류만 찾아줘. 나머지는 간섭 말고!”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정충두에게 정충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권화인, 소계원, 한비류............누구냐?” “씨발, 누굴 변태 취급 하냐?!” “그래서 이유는?” 정충현은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이 다시 물었다. 정충기의 날카로운 표정이 잠시 창백해진다. “......씹, 우정이라고 달아둬. 비류새끼 빨리 찾아!” 경고하듯이 말하곤 방을 나서는 정충두를 보며 정충기가 입을 벌리는 동안 정충현은 다시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데, 주룡회 표시준의 지부에 끌려간 놈이면 멀쩡하긴 어렵겠는데.” “.....찾은 겁니까?” “충두 녀석 들어오기 바로 전에 연락만. 바로 사람을 보내긴 했는데, 어차피 대부분 비어있을 테니 일이야 쉽겠지만. 어때, 난 좀더 녀석들의 놀이를 지켜보고 싶은데, 사천회가 아예 붕괴되면 충두 놈이 바락바락 악을 쓸테고.” “........사천회는 곧 소멸될 겁니다.” “....흐음, 내 생각은 다른데. 너는 동생뿐 아니라 소계원도 모르는군. 그 녀석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녀석은 이후로도 없을걸. 천성이 그림자지만 제왕이야. 같은 조건에서 붙는다면 나는 녀석 편에 서고 싶을 정도로.” “....즐기고 있군요. 그래서, 결과로도 소계원 쪽이라는 겁니까?” “.........사실, 내가 파악 못한 게 있는데.” “...?” “............권화인 만큼은 절대로 파악할 수가 없거든.” 정충현은 사람좋게 웃었다. ---------------------------------------------------------- “비류야!! 비류야!! 놔욧!! 놔아아!!” 멀대는 자신이 목줄기를 쥐고 있는 한비류라는 녀석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선명히 느껴지던 맥박이 빨라졌다가 다시 한없이 느려졌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이 녀석은 죽는다.. 멀대는 되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상관인 표시준이 죽이라는 명령까지는 내리지 않았다더라도, 그는 진심으로 녀석을 죽이고 싶었다. 한비류의 얼굴은 이미 거의 죽은 사람의 낯빛처럼 창백해졌다. 하지만 거의 마지막 힘을 엄지손가락에 싣는 순간, 그는 연수호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손을 놓고 말았다. 연수호는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서 비류를 감싸듯 안고는 흔들며 방어하듯 멀대를 노려보았다. 멀대는 이전보다 심하게 분노가 휘몰아쳤다. “끄어...비류야....흑흑.......비류야....일어...일어나아......으아아..끄윽....” 연수호는 쉬지 않고 울었다. 하지만 축 늘어진 비류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대는 호흡이 장시간 끊긴 탓으로, 아마도 다시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데 잔인한 쾌감을 느꼈다. 뇌에 일정시간 이상으로 산소공급이 중단되면, 인간은 뇌사 상태에 이른다. 봐라, 이 무기질 인형아. 너를 변하게 만든 저놈은 이제 저꼴이야. 너는 원래대로 돌아가야 해. 웃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울 수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멀대는 순간적으로 연수호의 가는 팔을 확 낚아 채 올렸다. 연수호의 작은 몸은 거의 질질 끌리듯이 그 창고를 나왔다. 하지만 그의 손은 절대 한비류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연수호는 거의 비명 같은 울음을 울면서도 끝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멀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그의 천부적으로 뛰어난 위험감지 능력 같은 거였다. 소리였을까. 어쩌면 그저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거칠게 잡고 있는 가는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놓기 싫었다. 그는 연수호를 끌어 창고를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작은 몸에 어디서 그런 힘이 있었는지 도무지 그의 몸이 한비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놔! 연수호, 놔!! 그건 죽었어!!” “아니야......싫어어.......비류야아......” 그의 피부가 따끔거리며 위험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그는 차라리 한비류를 어깨에 멨다. 그러자 이번엔 자진해서 연수호가 따라왔다. 창고를 나온 멀대는 자신이 내려온 계단이 아닌 다른 쪽 지하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면 몇 명일지 모르는 적과도 만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연수호는 헐떡거리며 따라오면서도 연신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정확하군.” 소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풍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용무늬 찻잔에 김이 오르고 있었다. 주명준은 자신의 뒤에서 마찬가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주룡회 간부들에게 아직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서, 설마 총?!’ 저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인 이유가 설마 그런가해서 주명준의 두 눈이 함지박만하게 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총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기습한 주제라곤 하지만 조직 싸움에 총은 불문율! 사실 자신도 그렇지만 않다면 권총 한두 자루정도 안끼고 올 이유가 뭐겠는가! “....그리고 배신도.” 움찔. 자신의 바로 뒤에 자리를 서있던 손지경은 누구나 눈치 챘을 법하게 몸을 떨고는 무안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소계원의 목소리에는 그것이 있었다. 짐승을 위협하는 기세. 저것이 그리 어리다고 깔봐왔던 그 소계원! 주명준은 이마에 땀이 차는 것을 무시하고 한발을 앞으로 내딪었다. 그래봤자 안에는 애송이 한명. “........후, 녀석이 사용한 패답군.” 소계원은 아주 작게 웃는 건지모를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반듯하고 유연해서 주명준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저렇게까지 완벽한 몸놀림은 본적이 없었다. “.....하하,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 안부를 여쭤야했는데.” “........별장에 가시면서, 못 뵙는 걸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게 잘 당부하고 가셨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계원은 찻잔 옆에 둔 진검을 검집에서 빼내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남들이 보면 정말 그런 대화였던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가 자세를 잡자 주명준은 쇠파이프를 검으로 바꿔 쥐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려들까, 혼자 맞서야할까. 저 어린 호랑이는 모두 물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해줘야 하겠지만, 솔직히 손에 든 것은 진검이 아닌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생전없던 겁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 떨리기 전에, 그는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의 주룡회 머리로서의 자존심은, 비겁함을 묵인할 수 없었다. 몇 번의 바람을 가르고 들어오는 칼을 피해내며, 그러나 이미 주명준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검은 언제나 비켜가는 소계원의 검에 막혔고, 그는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을 넘겨야 했다. 점차 자신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약점이 드러났지만 소계원은 그 약점을 공격하면서도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적어도 일대일상대로는 전혀 틈이 없는 놈이었다. 소계원의 검이 머리로 들어오는 걸보고 몸을 굽혔던 주명준은 순간 아뿔싸하며 자신의 칼로 가슴으로 들어오는 칼을 막으려 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의 배에 긴 자상의 피가 배어나왔다. 보고있던 주룡회 휘하 간부들의 입에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높아졌다. 내장이 상하진 않았지만, 더 이상 싸우기엔 무리였다. 소계원은 그대로 물러났지만, 주룡회 간부들은 아니었다. 열명이 넘는 그들은 한꺼번에 소계원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언제 다른 휘하들이 뒤따라 그 방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소계원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놀랍게도, 그러나 쓰러지는 쪽은 날렵하고 정확하게 상대의 급소만을 노리는 소계원 쪽이 아니었다. 전혀 불필요한 동작은 없었다. 깨끗하고 익숙한 동작이었다. 조금 뒤, 소계원은 사천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대한, 그래서 움직이는 데 시간이 걸렸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소계원은 무표정하게 지금부터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주룡회나 다른 피라미같은 세력정도는 사천회의 다리하나 상대할 수 없다. 이미 거대한 국가나 다름없는 사천회를 치려면... 전쟁은 피와 비명을 뿌리고 있었다. -------------------------------------------------------- “.......뭐라고? 적의 행동대장이 데리고 도주했다고?!” 정충현은 전화를 받으며 이마를 접었다. 이야기가 난감하게 돌아갔다. 날카로운 인상의 정충기가 손가락 끝으로 책상 위의 유리를 톡톡 치다가 정충현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몸을 굳혔다. -네, 바로 코앞에서 차를 타고 튀는 바람에... 뒤를 쫒고는 있지만... “...........서둘러라. 참, 사천회는 어떻게 되고 있지?” -주룡회와 여전히 대치중인 상태입니다. 더는 정보원들도 알아낼 수....... 뒷말을 흐리는 음성이 들려오자 정충현은 탐탁치 않은 감정이 솟아났다. 정계는 정보가 생명인 법인데, 이리도 부리는 자의 몸놀림이 둔해서야! 대선의 영향으로 정치권의 정세에 민감해있다 보니 제 손이 썩는 줄도 몰랐다! 정충현은 조만간 썩은 손발을 잘라내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서두르도록.” 정충기는 정충현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손에 잡힐 듯이 읽어냈다. 늘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온화한 저 정충현이란 인간은 머리로는 방아쇠당길 생각을 하면서도 어떠한 동요도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저 정보원들도 끝이로군. -저...그런데, 방금 안 사실입니다만.......주룡회 행동대장이 주룡회와 합류하려는 것 같습니다. 목적지는 사천회가 아닐지........ “사천회로 가고 있다고? 어쨌든 목표는 한비류다.” -네! 달칵. “....결국 한비류는 놓친 겁니까?” “이런 걸 예상한 건 아니지만, 결과로는 미리 충두한테 말해두지 않길 잘했군.” 벌컥. “........씹, 이럴 줄 알았어!!” 서재의 문을 거칠게 밀어 젖히며 정충두가 꽥 소리 질렀다. 정충현과 정충기는 갑작스러운 막내 동생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엿듣다니,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는군.” 정충기가 불쾌하다는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충두는 코웃음을 치고 다시 뒤돌아 뛰어나가려 했다. “니가 움직이는 건, 아직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충기의 목소리가 강하게 흘러나왔다. 한순간 정충두가 움찔거렸을 정도로, 화가 난 음성이었다. 정충현은 동생들의 공방을 보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녀와라. 단, 벌은 그 후에 받아야 한다.” “형!” 정충현의 말에 정충기가 강하게 반발했으나 이미 막내 동생은 뒤도 안보고 사라진 뒤였다. “정충기, 나이차가 많이 나는 덕에 우리가 충두를 애지중지하며 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너라면 알거다. 충두가 권화인이나 소계원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이일과 그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건 너의 권승인에 대한 감정과 관련 있는 건가?” “!!” 정충현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정충기의 차가운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네가 권승인을 두려워해 의학도가 된 걸 알고 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정계에 몸담은 집안이라고 자자손손 대물림할 이유는 없다.” “..............” “하지만 너와 충두의 차이가 뭔 줄 아나? 녀석은 권화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후, 고작 그것 뿐?” “...................충기야, 친구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걸 모른다면 너는 평생 권승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지.” “?!” “권승인이 손을 놓고 보고 있는 이상, 우리도 그럴 수밖에. 충두가 어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정충기는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정충현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져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 소계원은 지부 곳곳에 피를 뿌리며 널려진 주룡회 간부들의 처리를 지시하며 그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문을 열어두었으니 힘껏 무리해 들어온 개떼들을 눕히는 거야 쉬운 일. 문제는 개떼를 선동한 사냥꾼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거로군. “.........정말 많이도 몰려왔군요. 저희 사천회 빼고 전 세력이 결집한 모양인데요. 이거야, 이런 인원을 모으다니, 대단하군요.” “.....글쎄......그 정도만 대단한 녀석이면 좋겠군.” 사천회 행동대장인 서용덕은 그 많은 수의 인원을 상대하고도 멀쩡한 차기 보스의 말에 내심 놀랐다. “어쨌든 수습을 서두르도록. 잘려나간 강남지부를 포함해서, 피해가 크다. 전의 모든 세력을 되찾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군.” 소계원은 사천회의 하위 조직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벌써 반이나 되는 지부가 잘려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머리가 살면 꼬리도 사는 법. 회복 불가능한 상처는 도려내면 그만이다. “.........씨불, 새벽부터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더니만. 결국 이렇게 뻗을 걸 알면서도 덤벼, 덤비길.” 사천회의 한 조직원이 복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기절해있는 주명준의 몸을 발로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소계원은 땀에 젖어 이마에 엉켜있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여전히 긴장감으로 찌릿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직, 아직 아니다. 녀석은 아직 어둠 속에서 발톱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그가 예상했던 모든 가능성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주류 유통의 중단, 납기일의 압박, 마지막으로 이 조직계의 전면전으로 까지! 달리 뭐가 남아 있는가! “.....크, 큰일 났습니다! 큰형님이......., 큰형님이!!” “아버지가?” 소계원은 순간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굴러다니는 몸뚱아리 위로 경치를 구경하듯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곳에서 조차, 한없이 날카롭고 오만하게 빛나는 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녀석! 단신으로 겁 없이 사천회 심장부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녀석! “뭐...무슨.......!” 뒤처리를 하던 조직원들이 권화인의 내려다보는 싸늘한 눈빛에 마저 입을 떼지도 못했다. 조금의 먼지하나 묻지 않은 검은 정장이, 며칠 새 더욱 창백해진 얼굴과 대비되어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계원은 알았다. 녀석의 감각이 더없이 날카로우며, 녀석의 광기가 더없이 예민해져 있으며, 녀석의 이성이 이미 감정의 뒤로 물러선 후임을. 소계원은 마침내 자신이 온전히 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멋진 선을 그리는 입술에 자조적인 미소가 어렸다. 사천회의 본 기점인 머리를 지키려 했다. 어리석은! 사천회의 머리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아버지, 소경륭이었는데! “............훌륭하군. 어떻게 한거지?” “......그럼 지금부터 소경륭의 목의 가치를 얘기해 보지.” “저런!!” “저 미친놈이!!” 큰형님의 이름이 뒤늦게 새파란 낯모르는 녀석에게서 흘러나오자 사천회의 간부들은 모두 흥분했다. 하지만 소계원이 손을 들자, 순식간에 침묵이 흘렀다. “.........흥정이라. 너 답지 않군.” “....글쎄.” 소계원의 나직한 말에 권화인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사냥을 끝낸 자의 여유와 잔인함이 흘렀다. 하지만 더욱 깊이, 상상도 못할 만큼의 분노가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음을 소계원은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 위협하는 맹수의 그것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이 사천회를 전부 엎어야 들을 마음이 생길건가.”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 입을 여는 권화인의 눈동자에는, 여유로운 몸짓과 표정과는 다른 초조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소계원은 순간, 식은땀이 났다. 권화인은 사천회를 부술 수 있었다. 굳이 소경륭의 목을 잡은 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함일 뿐. ...나는, 나는........너를 분노로도 사로잡을 수 없는가! 뜨거운 덩어리가 목을 타고 넘어왔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 녀석을 되찾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가! “......비류 녀석과 함께 살기 전의 너는, 아마 나를 죽였을 거다.” “................그렇겠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여전히 너를 봐주지 않는 비류를 보면서, 어리석게도 변했다고!!! 첫사랑이니 뭐니 꿈같이 잔인한 소리만 하며 떠난 그 녀석을 사랑이라도 한다는 건가?!” 첫사랑이란 소리에 권화인의 유려한 한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드물게 흥분하고 있는 소계원과는 달리, 그의 분노는 더욱 집요했고 날카로웠으며 조용했다. “......내 것을...........돌려받겠다.” 권화인은 나직히 입을 열었다. 첫사랑이란 말에 분노로 폭주라도 해주길 바라던 소계원은 저도 모르게 턱이 조여들었다. “.....말했듯이, 첫사랑을 찾으러 갔다. 내가 보내줬지. 그리고.........” 권화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꼭 쥐어지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긴장이라니! 너 답지 않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 쾅. 두꺼운 테이블이 두조각을 내며 갈라졌다. 권화인의 주먹이 허공에 뜬 채 부르르 떨렸다. 맹수의 결박은 풀렸다. 그리고 위험을 감지한 조직원들이 차례로 소계원의 앞을 막아설수록, 결국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갔다. 퍽퍽퍽. 소계원은 권화인의 주먹이 심장만을 정확히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죽일 셈이로군. 그가 쓰게 웃으며 권화인의 명치를 차기위해 발을 들었다. 그러나 상대 쪽이 더욱 빨랐다. 퍽. “으윽!” 심장을 노리고 들어온 주먹은 위치를 조금 비끼며 왼쪽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극심한 고통을 느낀 소계원이 주춤한 사이, 두 번째의 주먹이 이번에는 정확히 심장을 쳤다. “커헉!” 소계원이 마지막이라고 느낀 세 번째 주먹이 심장의 위치를 노리고 들어왔다. 어리석게도 비류 녀석의 위치를 말하지 않은 데 대한 후회는 들지 않았다. 무릎이 풀리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덕분에 위치를 벗어난 주먹은 소계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의 고개가 홱 젖혀진 채 피를 뿜었다. 그의 몸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무너졌다. ----------------------------------------------------------------- “으악! 권화인!!”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떡이 된 계원이 새끼를 이성을 잃은 화인이 새끼가 족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이성을 잃은 화인이 놈에겐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래 전의 여름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그보다 배는 상황이 나빴다. 씨발, 으악, 저러다 진짜 계원이 새끼 죽겠다아!!!!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뒤에서 권화인을 걷어차며 외쳤다. “미친 새끼야!! 정신 좀 차려!!!” 홱. 급히 다리를 구부려 피한 주먹이 머리 위를 바람소리를 내며 스쳐지나갔다. 히끅, 저 쇠주먹을 내가 알지! 이 놈은 빡 돌면 도무지 힘 조절을 안한다고! “으아아악!! 거기, 너, 임마!! 당장 비류 좀 흔들어봐!!!!” 나를 향해 들어오는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내가 꽥 소리쳤다. 비류를 부축하고 있는 꼬챙이처럼 마른 놈은 멍하니 우리 쪽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눈만 꿈벅 거렸다. 퍽. 으윽. 결국 피하지 못한 주먹이 어깨에 맞자,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씨바아알!! 야, 비류 안깨워?! 어째서 비류 새끼는 저런 것들만 달고 다니는 거야!!!” 멈칫. 내 거의 발악(?)과도 같은 비명에 화인이 새끼의 몸이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는 시체(?)들 가운데에 쓰러져있는 비류와 멍하니 볼을 붉힌 채 여길 주시하고 있는 머리 나쁜 놈에게 시선이 향했다. .......꿈틀.... 거의 정신을 잃고 날뛰고 있던 화인이 새끼의 이마에 혈관이 잡혔다. 그 시선의 끝에는 비류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꼬챙이의 보잘것없는 손. 우와아아악!! 이 미친 새끼는 폭주 모드일 때마저 저런 바퀴벌레의 발톱만큼도 티 안나는 거에 반응한단 말이야?!! “야!!! 튀어엇-!!!!” 꼬챙이에게 가려는 화인이 새끼의 허리를 잡고 매달리며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쿠당탕. “꽥!!” 정신 나간 화인이 새끼의 괴력. 미친놈이 장사란 건 확실하다!!!<-내팽개쳐져서 자존심히 상하는 중;; “.......어떻게........화....인이?!” 꼬챙이의 소심하고 중요하지 않은 반응은 내비두고, 목덜미가 잡힌 채 달랑 들어올려 져서 막 임종을 코앞에 둔 가련하기 짝이 없는 정체불명의(멀대를 발견해 해치우고 비류를 데려가려해도 막무가내로 붙들고 늘어지기에 데려왔을 뿐;;) 꼬챙이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 놈도 나쁜 놈이다;; “....야........” 멈칫. 허걱, 나는 보았다! 신음소리 같은 비류 새끼의 음성에 화인이 새끼가 들고 있던 꼬챙이마저 패대기치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다! 순식간에 비류에게 달려간 화인이 새끼가 엉망인 비류의 몰골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크윽! 쏠린다) “......저거 뭐냐......” 비류의 눈이 가리키는 곳엔....피로 떡이 된 계원이 새끼 한 마리... “.......몰라.” 으어억! 지 놈이 양심이 있으면 저리도 뻔뻔하게 거짓말을!!(더구나 이 악마 같은 새끼는 화사한 눈웃음까지 날려댔다....;;) “.............나.......안보고 싶었냐....” 내 분명히 말하지만 비류 저 새끼, 지금 제 정신 아니다. 누구보다 저 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저 놈은 저런 말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 뻔한 말에 넘어가 귀때기를 붉히고 있는 화인이 놈도 인간은 아니다.... “.....금방 오려고 했는데.........나..납치를 당해서......쿨럭....쿨럭..” ...............오해할까봐 밝혀두겠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내 눈에도 저 새끼가 구라 까고 있다는 게 보인다. 납치당해있었다는 말은 사실일지언정, 저 글썽글썽 눈알 굴리기는 도무지 저 새끼의 진심이 아니다.(화인이 놈이 기억할런지..어렸을 때, 지 놈에게 숙제를 떠맡길 때 저 새끼 눈알이 저런 궤도를 그렸다는 것을....) 또한, 저 할 말 다 하고나니 터지는 어설픈 기침은 뭔가. 지가 감기 환자가 아니고서야... 뿌드득. ......그렇다. 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단지 비류 놈이 지 변명만 하고나서 다시 기절해버렸다는 것과, 분노의 오오라를 한층 강하게 뿜던 화인이 놈이 기절한 비류 새끼 때문에 겨우 성질을 가라앉혔다는 것. 그리고 구급차를 불러야한다는 내 주장에 콧방귀를 뀌던 화인이 놈이 달랑 비류 놈만 홀라당 들고 나가버리는 통에 내가 더없이 기가 찼다는 사실... 더욱 더 황당했던 것은.....................................................................어째서 밖에 경찰의 무장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이 새끼는 사천회를 싸그리 잡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충두가 계원이 아버지 인질극을 들은 것은 그보다 후의 일.. 아, 그 꼬챙이는 웬일인지 병원까지 쫒아왔다.....그런데 이놈, 대체 누구야? ------------------------------------------------------------------ -화인이는 아폴론 같아. -저기, 물론 여자친구 있지, 그 애? -비류, 너는........서풍의 신 제피로스야........히아킨토스를 사랑해서 결국 죽여 버리고 말았던..알겠어, 태양의 신 아폴론은 히아킨토스를 사랑했어........ 의미 없는 기억들이 반복되다가 사라졌다. 볼을 붉히던 수호형........수호형....... “..비류야......정신이 드니?” 수호형의 동그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고 그 곳이 병실이란 것을 알았다. 온 몸이 미라처럼 돌돌 말려있는 것으로 볼 때, 꽤나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른 녀석들은...?” 화인이 녀석을 봤던 것 같은데....꿈이었나.. 제길, 그때 한 말은 지금이라면 곧 죽어도 못한다..그건, 절대로 생존욕구와 필사의 자기보호본능이 혼합 되서 나타난 일시적........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 그리고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가고 싶었어.” 수호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몰랐어요, 수호형.” “어........어어, 갑자기 왜 다시 존댓말?! 하하.......하..” 툭. 이불에 떨어져 동그라미를 그리며 퍼져가는 눈물방울. 끝까지 이렇게 울고 가는 구나, 이 사람은. “..........미안해요.....” “...........응.......” “...괜찮아요?” “.................응...응....” “.......거짓말.” “............너니까 괜찮아.........라기 보다는 실은, 나도 몰랐으니까...” 수호형은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강해진 겁니까... “너 그거 아니? 나한테도 화인이가 첫사랑이었어.......” 그래요, 아직도 사랑하는 거 압니다.... “그리고 너 아니? 사실 몇 번이나 니가 깨어나지 못하길 바랬는지...못됐지?” ......거짓말이란 거 압니다... “다 몰라도 이건 알아야 해. 그 애, 사흘 동안 잠시도 너를 떠나지 않았다는 거....”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 히아킨토스..........” 수호형은 그렇게 말하며 병실 문을 열었다. “아, 비류야. 내가 그 말은 했어..그.......강간당할 뻔한 거......” “히끅! 그럼 지금 그 녀석은....” “..........복수....가 아닐까? 괜찮아, 그 사람은 좀 당해야 해. 그럼 안녕~” 밝게 손을 흔들고 나간 수호형과는 반대로 다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 나. 빌어먹을, 첫사랑과의 이별이고 뭐고 신경 쓸 새가 없잖아!! 달칵. “...........일어나셨군.” 문을 열고 음산하게 입술을 비트는 권화인. 나는 녀석이 한층 업그레이드 공포모드로 진화했음을 깨달았다. 녀석은 큰 보폭으로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걸어오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실 TV, 패스다.” 허거, 쪼잔한 놈! 내가 목숨을 걸고 쟁취한 걸!! “..............그리고 10번.” “미친!! 날 죽일 셈이냐!!” 나는 공포로 소름이 오도도 돋는 걸 느꼈다. 저 검은 눈빛은.......절대로 진심이다... “.................................-_-++, 20번.” “..........왜 자꾸 느는 거냐;;” “.....................흠, 30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표리부동? 비굴?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30번을 깔리느니 입을 더럽히고 만다. “.........사랑으로, 한판만 하면 안돼냐.”<-비굴비굴 “...............하는 거 봐서.”<-흐뭇 ------------------------------------------------------------- “빌어먹을, 난 정말 저 새끼들이 싫다. 병실에서 꼭 저 짓을 해야 하는 거냐?!” 충두 녀석이 병실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에 창백해지더니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더 기분이 나쁜 건, 비류의 신음은 왜 ‘하앗..으응’이 아니고 ‘으억..크윽’인 거냐?!!” “.......................오늘은 못볼 것 같군.”<-못들은 척 “야, 이 새끼야!! 안 궁금하냐고!!” 발악하는 충두 녀석을 두고 몸을 돌려 내 병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갈비뼈는 내가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한다. “..........야, 표시준은 어떻게 했어? 니가 처리하기로 했다며?” “아아, 처리라고 해야할지...오늘 화인이녀석에게서 넘겨받은 표시준은 이미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서....” “................크크크, 그럴 줄 알았다.” 충두 녀석은 배를 치고 웃었다. 나는 다시 한번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오는 병실을 돌아보고 고개를 돌렸다. “근데 그건 뭐냐? 주머니에 삐져나와있는 건?” “아아, 러브젤.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이미 늦은 모양이군.” “허거, 비류가 좋아했을 텐데! 불쌍한 놈..” 끝이란 언제나 같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원히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인이 녀석이 있고, 충두 녀석이 있고, 내게도 웃어주는 비류 녀석이 있으니.....모든 것이 이대로 좋을지도. 너에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 네 가시투성이 시선을 견뎌내면, 얼음 같은 말 몇 마디 가슴으로 받아내면, 몰래 잡은 손이 뿌리쳐지기 까지는, 너에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은 언제나 제자리였지만. Fin. ------------------------------------------------------------------------------------ 아아, 끝입니다!! 정말 끝입니다!! 이 질긴 Call the turn, 다시 쓸 일 절대 없습니다!!(속시원) 외전을 시작한 걸 어찌나 후회했던지..(흑흑) 그래도 끝내고보니 너무너무 기분 좋군요...(흐뭇) 절 마구마구 질타해주신 여러 여러분, 감상 주셨던 분들, 잊지 않고 이 글을 마저 봐주시는 여러분.........모두 감사합니다.. 어느새 아침이 다 되었군요...개강도 다가오는데 이렇게 낮과 밤이 바뀌어서야...(한숨) 언제나 행복한 하루 되세요~